top of page
Search

휴스턴 순복음교회를 섬긴 지 23년째다. 오랜만에 아내와 딸과 함께 식탁에 앉아 이야기하던 중 어떤 말끝에 아내가 나에게 “당신은 교회를 섬기면서 힘들지 않았다”라고 한다. 요즘은 몰라도 적어도 지난 20년은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는 힘들었는데 나는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했기에 힘들지 않았고, 자기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하는 나를 쫓아오다 보니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기는 매사에 의지가 없어졌다고 한다. 잘했다는 말은 아니어도 수고했다는 격려는 듣고 싶은데… 나는 힘들지도 않았고, 아내는 나 때문에 의지를 잃었다니 … 기분이 나쁘다. 기분 나쁨을 넘어 아내를 희생시키면서 나하고 싶은 목회를 했나 하는 생각에 충격이다. 사실 딸아이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나온 말이지만 내 가슴 깊이 찌른다.

     

힘들어진 교회이기에 34살 먹은 철부지 목사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모두가 보기에 좋은 교회라면 나에게 주어졌을까? 그래서 감사했다. 비가 올 때마다 물을 퍼내어야 하고, 곰팡이냄새 진동하는 낡은 건물임에도 한 달 헌금을 다 모아도 페이먼트도 안되었다. 그래도 기도회 하고 싶을 때 기도하고, 몇 안 되는 성도님들과 수박 쪼개어 놓고 교제할 수 있는 자체 건물이 있음이 감사했다. 이렇게 나는 감사함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심방도 신났고, 예배도 기다려졌다. 내 눈에 교회 외에는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다 지난 20년 동안, 예배당 이전하고 싶을 때 이전했고, 체육관 짓고 싶을 때 체육관 짓고, 교육관 짓고 학교 하고 싶을 때 학교하고, 이엠사역도, 스페니쉬 사역도 하고 싶을 때 시작했다. 화려하진 않아도 말 그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왔다. 그래서 누군가가 홍목사님은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한다고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억울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오늘 하나님은 아내를 통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게 하실까?

     

문득 어릴 적 가파른 언덕길에서 리어카와 굴렀던 사건이 생각났다. 이모집에 놀러 갔는데 이종사촌형이 드라이브 시켜준다면서 나를 무거운 리어카에 태워주었다. 그런데 언덕에서 구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아니 신났다. 사촌형이 언덕길에서 힘이 부쳐 리어카의 손잡이를 놓치는 순간 리어카는 비탈길을 내달리다 굴렀다. 그때 나는 리어카 속에서 리어카와 함께 내달리다 굴러서 온몸에 상처와 멍이 들었다. 그때 미안해하시며 감춰두었던 고등어를 꺼내 구워주시던 이모님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다. 하나님의 손이 지난 23년 동안 붙잡아 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3,24)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붙잡아 주셔서 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행여나 내가 잘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처럼 보였어도, 수많은 위기에 쓰러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나와 교회를 붙잡아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아내의 말에 섭섭함이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 내 인생을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손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촌형처럼 힘이 부쳐 놓지 않는다고 한다. 내 인생을 의로운 오른손으로 지금까지 붙들어 주셨고 앞으로도 붙들어 주신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손을 보는 자는 섭섭할 수 없다.

     

     

홍형선 목사

 
 
 

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린다. 갑자기 찾아온 폭우 때문에 50분 정도 늦게 출발하더니 구름을 헤치고 비상해서 그런지 위아래로 심히 흔들린다. 흔들림에 물건들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도 모르게 의자를 꼭 부여잡았다. 그러면서 ”요즘 비행기 사고가 많은데 “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비행기의 흔들림에 본능적으로 의자는 꽉 붙잡았지만 죽음은 두렵지가 않았다. 아니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믿음의 선배들이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보여도 내 주님 이제나 오시렵니까 “라고 외쳤다더니 나도 주님 만날 기대감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서인가? 삶이 버거워서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민 36장에 보면 슬로브핫 딸들이 가나안 동편에서 광야에서 죽은 아버지의 기업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한다. 아들이 없다고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으면 아버지의 이름도 끊어지고 자기 가문도 사라진다면서 기업을 요구한다. 그러자 이들이 속한 므낫세 지파의 족장들이 반문을 제기한다. 이 딸들에게 땅을 주었다가 이들이 다른 지파 남자들에게 시집가면 자기 지파의 땅이 줄어들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경계가 흐트러진다는 것이다. 결국 모세는 슬로브핫 딸들에게 아버지의 기업을 주되 결혼은 자기들이 속한 므낫세지파의 남자들과만 결혼하라고 한다.

     

성경은 어찌 보면 이 사소한 문제를 민수기 마지막 장에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이들이 어디에 있는가? 요단 동편이다. 아직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않았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가나안족속들과 7년 이상 정복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슬로브핫 딸들과 므낫세 지파의 족장들은 마치 가나안땅에 들어가 기업을 분배하는 자리에 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슬로브핫 딸들이나 이스라엘 족장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에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 안수받은 지가 28년이 되었다. 휴스턴 순복음교회를 섬긴 지는 22년이 되었다. 솔직히 많은 부분에서 열정이 식어간다. 타성에 젖어가는 것 같다. 이러다가 성도님들에게 상처 주는 목회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무슨 말인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목사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만 안된다는 말이다. 그날을 맞이하는 심정으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슬로브핫 딸들이 오늘을 그날처럼 살았듯이 나도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이번 한 주간 “허용”이라는 단어를 묵상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향해 가던 중 요단 동편 길르앗 산지의 푸르름과 풍요를 보았다. 그리고 이 풍요로움에 매료된 르우벤지파, 갓지파와 므낫세 반지파가 이 땅을 기업으로 달라고 간청한다. 분명 하나님은 가나안의 경계를 북쪽으로는 호르산이고, 남쪽으로는 신광야이고, 서쪽은 대해이고, 동쪽으로는 염해라고 규정해 주었음에도 약속의 땅이 아닌 길르앗산지를 달라고 떼를 쓴다. 그리고 이 간청함에 하나님은 허용하신다. 이외에도 하나님은 왕을 달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간청과, 발람선지자의 간청에도 허용하신다. 이렇듯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도 간청하면 허용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내 삶에도 허용하심으로 다가온 것이 많다(가정, 이민, 목회..). 나는 기도응답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허용하심인 것이 많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허용하심이 축복인가? 허용하심으로 요단동편 길르앗산지에 정착한 두 지파 반은 계속된 아람나라와 암몬의 침공으로 고생고생하다가 결국 앗수르의 침략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도 응답으로 허락된 왕 때문에 고생 고생만 하다가 나라는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다. 그렇다면 허용하심이 진정한 응답이 되고 축복이 되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교회 연못이 지저분하다. 온갖 쓰레기가 갈대 사이에 쌓여있고, 갈대는 뻗을 대로 뻗어 연못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교회의 자랑스러운 연못이 흉하게 보인다. 그래서 청소하기로 마음먹고 해가 진후 낚시옷을 입고 갈대를 벨 낫을 들고 연못으로 갔다. 내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과 진흙뻘을 헤집고 다니며 쓰레기(축구공 3개, 야구공, 고무공, 물병, 컵 등)를 줍는데 큰 쓰레기 봉지 가득이다. 2미터 이상 자란 갈대들은 왜 이리도 무거운지 온몸에서 땀이 흐른다. 거기에다 낚시옷 어딘가가 찢어졌는지 비린내 나는 물들이 스며들더니 몸이 무거워진다.

     

사실 그 누구도 나에게 연못청소를 하라고 한 사람이 없다. 연못청소가 영혼구원이나 교회성장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연미가 있고, 깨끗한 분수가 있는 교회 연못을 자랑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또한 큰 틀에서 “허용”이다.

     

의욕 있게 달려들었지만 깊은 진흙 뻘 속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기다 보니 힘이 들었다. 힘이 드니 짜증이 난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봐주었으면 하는 공로자의 의식이 있었는데, 힘이 드니 ”꼭 내가 해야 하나“ 라는 생각 속에 여러 얼굴들이 떠오르며 비교의식이 지배한다. 그 순간 어떻게 하면 허용이 축복이 될 수 있을까? 허용하심 속에 공로자 의식과 비교의식 속에 빠지지 않고 축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속에 “주님! 당신이 사랑하는 신부들이 깨끗한 연못을 보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주님! 저에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라며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시선을 두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다 내 안에서 기쁨이 흐르더니 기쁨이 나를 감싼다. 그리고 진흙뻘속에 뒹구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허용하심이 축복이 되려면 축복으로 다가온 것에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허용하신 하나님께 시선을 두어야 함을 배우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나를 시궁내 나는 진흙뻘에서 공로자의식과 비교의식으로 뒹굴게 놓아두지 않고 허용하심의 축복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주님! 감사해요.

     

     

홍형선 목사

 
 
 

Address: 1520 Witte Rd, Houston, TX 77080

Contact Us: 713-468 2123 l fghouston1959@gmail.com

© 2017 by Full Gospel Houston. All Rights Are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