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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는 거절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어느 집회에서 강사로 초청이 있었고, 또 어느 단체에서 내게 방문을 부탁했지만 거절해야 했다. 부족한 나를 귀하게 여기고 초청한 것도 감사하고, 소개해준 분을 생각하면 순종해야 하지만 거절했다. 기도가운데 교회를 생각하고, 본질을 생각할 때 마음이 불편하여 거절했다. 사실 나는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거절했다.

     

이번 한 주간 내 귀에 들려온 소리는 “자랑스럽지는 못해도 부끄러운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순결하고 성실하게 살겠다 “는 고백들이었다. 한국의 찬양사역자인 장종택목사님이 내게 영상을 보내주면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다. 너무 귀한 고백이라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는데 금요일 새벽 예배에서 말씀을 전해주신 김성태 목사님께서 식사교제 자리에서 똑같은 고백을 한다.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고백을 연이어 듣게 하실까?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일까? 또 순결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말들이 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런데 생명의 삶을 따라 디모데전서를 읽는데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권면 중에서 문득 선택이라는 단어가 떠 오른다. 선택은 출발이고 이 출발은 내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느냐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선택은 여러 가지 속에서 내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근거로 선택한다. 그리고 이 선택이 내 인생의 발자국을 만든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선택을 잘한 사람들이다. 모세는 애굽의 부귀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난 받기를 선택했고,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 앞에서 청년 때의 순간의 쾌락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치 않는 것을 선택했고, 룻은 모압의 안정적인 삶보다 여호와를 따르는 길을 선택했다. 이렇듯 성경인물들은 선택을 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선택들이 이들 모두에게 믿음의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이 어렵다는 것이다. 갈등이 많을수록 선택이 어렵다는 것이다.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지 노년의 바울은 목회의 길을 시작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내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고를 하노니…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딤전 1:18,19)“고 한다. 믿음과 양심을 지키는 선택을 하라는 말이다.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영적 전투를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때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왜 거절을 못할까? 왜 선택 앞에서 갈팡질팡 할까? 가치가 혼탁해서 그렇다.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왕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주님은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라고 하신다. 인생을 살고 난 뒤에 내 발자국이 아름답고 싶다.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오늘 나의 선택이 믿음의 발자국을 만든다는 사실 앞에 선택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주님만이 왕이십니다.

 
 
 

이번 주에 교제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Cross foundation을 섬기는 영미 cross 집사님과 교제했다. 크로스파운데이션은 1년에 한 번 직원들이나 자녀들에게 프로젝트를 만들고 그 프로젝트의 10% 이상을 자신의 재정을 헌신하면 미팅을 거친 후 2만 불까지 나머지 90%를 크로파운데이션에서 충당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다음 세대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일에 헌신함을 길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마디로 기독교 리더십을 세워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느 집사님은 아르바이트하는 아들에게 일하는 곳에서 pay만큼만 일하지 말고 pay이상으로 일하되 그 일에 투자하는 마음으로 일하라고 했다고 한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라 여기고 일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 또한 기독교적 청지기 교육이다.

     

수요예배에서 김문수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중 충격을 받았다. 월요일 새벽예배 시에 최근녕목사님께서 말씀 중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아는데 사실은 한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다”면서 몇 가지 증거를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충격은 김문수목사님의 반응이다. 나 같으면 이것이 사실인지부터 확인할 것이다. 그것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구글이나 챗GPT를 통해 조사할 것이다. 그런데 김문수목사님은 갔냐? 안 갔냐? 보다 “죽으러 갔구나. 한국땅에 복음 때문에 죽으러 갔구나”로 받아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보고 죽으라면 죽고, 잘살게 하면 잘살고, 여기 있으라면 여기 있고… 하겠다고 고백한다. 무서운 신앙고백이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순수성을 보고 만났다.

     

교회 정문 앞 화단은 제목이 없다. 큰 선인장 두 그루가 있는 화단에 화분이 한 개 두 개 생길 때마다 심기 시작하다 보니 이름 모르는 꽃들과 화초가 어우러져 버렸다. 그래서 작은 정글 같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방문 중에 계신 어느 예술가분이 멋진 화단이라고 한다. 어이가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자유함이 있어 좋고, 직사광선을 싫어하는 식물은 좀 더 큰 화초밑에서 자라듯 서로가 어우러져 서로를 보호해 주는 모습이 좋다고 한다. 이런 칭찬을 들으면서 이것이 하나님나라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 주간 혹은 하루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신앙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면서 내 안의 하나님 나라가 만들어지고 아름다워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모두가 소중할 뿐이다.

     

홍형선 목사

 
 
 

오랜만에 우성만목사님 가족과 만남을 가졌다. 마지막 졸업논문을 쓰느라 고생해서인지 갸냘픈사람이 더 야위어 보인다. 이야기 도중 “하나님은 정말 계산할 줄 모르시는 것 같아요. 상식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한다. 논문을 마치면서 인생의 진로를 고민하는데 자기에게 3가지 길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하나는 지금 일하고 있는 IT계통에서 계속 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수의 길을 가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중에 가장 쉬운 길이 IT계통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감동주시기를 이 세 가지 중 첫 번째로 내려놓아야 하는 것으로 제일 편하고 미래가 보장된 것 같은 IT계통에서 일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계산적으로 보면 가장 안정적인 길인데… 하나님은 가차 없이 아니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계산으로, 상식으로 이해 안 되는 것들이 참 많다. 더욱이 주의 일에는 많다. Day spring(수단난민학교)의 여름방학을 맞아 휴스턴에 잠시 들렀던 딸아이가 이집트로 돌아갔다. 딸아이를 볼 때마다 “좀 더 공부해서 전문성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휴스턴에 와서도 재미있는 물건을 보거나 맛난 것이 보일 때마다 수단난민학교 아이들과 연결시키는 모습에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그래서 고작 하는 말이 “시집가야지”라는 말과, 고작 하는 행동이 여행가방 싸는 딸아이에게 내가 먹으려고 사놓았던 과자봉지를 슬며시 주는 것뿐이다. 교회가 VBS로 바쁘다. 다음 주는 20명이 튀르키예로 선교를 간다. 모든 것이 쉽지 않고 계산이 안 맞는다. 정말 하나님은 계산할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계산할 줄 모르는 역사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 ”그것도 십자 위에서 나의 죄를 지고 죽기 위해 오셨다 “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죽으시는가? 계산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계산이 안되고 비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믿음의 사람이라 불리는 바울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다. 짐 엘리엇도, 언더우드 선교사도 그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계산이 안 되는 행동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들은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산을 못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일보다 나의 변화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나의 삶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사업 품목은 내 생각과 다르다. 그러니 나의 계산방법과 다를 수밖에 없다.

     

짐 엘리엇 선교사님의 일기장에 기록되었다는 이 한 문장이 오늘따라 가슴 깊이 다가온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자기가 지킬 수 없는 것을 주고, 잃을 수 없는 것을 얻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이것이 지혜가 아닐까?

이것이 정말 최고의 계산이 아닐까?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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