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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앵커리지 은혜와 평강교회 신년집회에서 말씀을 섬기기위해 새벽에 집을 나섰다. 알래스카 추위를 생각하며 내게있는 바지중에 제일 두꺼운 바지에 두꺼운 티셔츠 두개 위에 점퍼를 입고 두꺼운 코트를 집어들고 집을 나섰다. 새벽이어도 휴스턴은 화씨 74도이다. 74도에 이렇게 중무장하고 나서려니 덥고 동작이 무겁다. 옷이 날개인데 나는것은 고사하고 날개짓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추워야 얼마나 춥다고, 그곳도 사람사는곳인데 … 이렇게 투덜거리며 에어컨을 최대한 내리고 공항을 향해 가는데도 등 뒷쪽에서 땀이 나는것 같다. 비행기가 출발하고 2시간도 안되어 한기가 느껴지더니 중간 경유지인 시애틀에 도착하니 두꺼운 옷이 더 이상 두껍고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화씨 36도인데도 들고 있는 무거운 코트가 든든함을 준다.


앵커터지에 도착하니 화씨 12도이다. 휴스턴에서 출발할때는 74도였는데 12도이다. 8시간 비행만에 온도가 62도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안 춥다. 저 멀리 보이는 앵커리지를 감싸안고 있는 눈덮인 산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풍경같다고 여겨질 정도로 추위에 여유가 있다. 다음주에 방문할 Fairbanks는 화씨로 -27라는데, 휴스턴과 100도 이상 차이가 나기에 겁부터 났는데 왠지 괜찮을것 같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겁고 두터운 옷이 나에게 이런 안정감을 주고 있다.


휴스턴에서 시애틀로, 시애틀에서 앵커리지로, 앵커리지에서 훼어뱅스로 변화무쌍한 날씨속을 옮겨 다녀도 따뜻하게 나를 보호해 주는 옷이 있듯이, 변화무쌍한 인생속에서도 나를 여전히 덮고 있는 옷이 있다. 카나프(כָּנָף), 은혜라는 옷이다. 이 은혜의 옷이 나를 두르고 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의 이불속으로 들어가며 “당신의 옷자락(카나프)으로 나를 덮어 주소서”(룻3:9)라고 했나 보다.


나는 시골 촌놈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깡촌 출신이다. 하나님은 이런 촌놈을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 주셨다. 전적인 카나프 은혜이다. 또 이런 촌놈을 미국으로 옮겨주시고, 미국에서 좋은 성도님들을 만나 23년간 한 교회를 섬기고 있는것도 카나프 은혜이다. 이런 나에게 오늘은 알래스카까지 와서 복음을 전할수 있게 하고, 시간 시간 좋은 분들과 교제케 한다. 오늘 점심은 93세되신 장로님이 젊은 나에게 식사 대접을 해 주셨다. 이 또한 카나프 은혜이다.


카나프라는 단어에는 날개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룻이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어달라는 말은 당신의 날개로 덮어 달라는 말이다. 이 말이 은혜가 된다. 다음주면 화씨로 -27(섭씨-33도)인 훼어뱅스에 복음을 전하러 간다. 내 인생가운데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추위이다. 하지만 두터운 옷 덕분에 두려움보다 설레인다. 내 인생도 교회도 가정도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서있지만 두렵지 않고 설렌다. 왜냐하면 카나프 은혜 때문이다. 카나프가 날개로 나를 감싸 인도해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주여!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

 
 
 

새벽예배에 왔는데 오른쪽 볼 위에 머리카락 한 올이 있는 듯 간지럽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제거하려고 볼을 여러 번 문질렀는데도 여전히 간지럽다. 그리고 이 간지러움이 주기적이다 보니 신경이 쓰여 예배에 집중할 수가 없다. 이렇게 간지러움만 신경 쓰다가 새벽예배가 끝났다.

     

그런데 갑자기 불안하다. 혹시 신경에 문제가 있어 간지러운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나에게도 뇌졸증이 온 것인가?라는 불안감에 챗 GPT에게 “오른쪽 볼위가 머리카락 있는 것처럼 간지러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피로나 수면부족일 수 있고 대상포진 초기 증상일 수 있다고 한다.

     

“대상포진 초기 증상”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다음 주에 있을 알래스카 집회에 대한 걱정이 들면서 초기에 빨리 치료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교회 안에 계신 여러 의사분들 중 어느 의사분에게 상담하고 대상포진약에 대한 처방전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또 얼마 전에 이명기집사님이 대상포진으로 고생하셨는데 드시다 남은 약이 있을까? 집사님께 몇 시쯤에 전화 하면 좋을까? 등 온통 치료약 구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런 생각 속에서도 새벽기도 시간이니 먼저 기도하자며 억지로 기도하는데 기도내용도 온통 치료해 달라는 기도뿐이다. 그러다 간지러움이 멈추면 기도응답받은 듯 기뻐하다가 다시 간지러우면 또 치료를 위해 기도했다. 기도를 마친 후 말씀을 읽는데 오른쪽 눈에 줄이 보인다. 안 좋은 일은 무더기로 온다더니 대상포진에 눈마저 문제가 생겼나 보다. 그래서 눈동자를 돌려보니 오른쪽을 볼 때마다 줄이 보인다.

     

이런 불안감에 눈 상태를 보려고 밝은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눈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것이다. 눈가의 촉촉한 부분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다 보니 손으로 수없이 머리카락을 훔쳐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던 것이다. 대상포진도 아니고 눈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두어 시간 동안 쓸데없이 걱정만 했다는 것에 허탈감이 밀려왔다.

     

거울 앞에 서기전까지는 나 스스로 대상포진이라 여기고 걱정만 했던 모습에서 나의 영적상태가 보였다. 오른쪽 볼이 간지럽기에 열심히 머리카락을 털고, 챗 GPT에서 간지러움의 증상을 찾고, 병 낫기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듯이 나는 사역을 위해, 교회를 위해 열심이 있다.

     

새벽에 나오고, 늦게까지 열심히 사역하고, 교회를 위해 마음을 쓴다. 그런데 오늘 질문이 생겼다. 이 열심이 거울 앞에 선 열심인가, 아니면 내 생각을 붙들고 달리는 열심인가.

     

주님 앞에 서서 비추어 보지 않은 열심은 쉽게 불안과 상상에 끌려간다. 확인되지 않은 생각이 사실이 되고, 염려로 분주하다.

     

오늘 아침, 머리카락 한 올이 나를 가르쳤다. 먼저 거울이신 하나님 앞에 서라고, 먼저 말씀에 비추어 보라고, 먼저 사실을 보라고….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나를 세우는 것이 열심보다 먼저임을 다시 배운 새벽이었다.

     

홍형선 목사

 
 
 

내가 원해서 일수도 있고 상황에 이끌려서 일수도 있는데 나는 여러 곳의 땅끝을 방문해 보았다. 한국의 땅끝인 해남도 가보았고, 아프리카의 땅끝인 케이프 호프에도 서 보았고, 대만의 땅끝인 고구마 꼭지 같은 곳도 가보았다. 오늘은 미국의 최남단인 Key West에 가 보았다. 교단의 실행위원 모임이 마이애미에서 있었는데 실행 위 모임 중 누군가가 Key West에 갔다 오면서 차에서 토의하자고 하였고, 내가 적극 지지하여 8명 모두가 가게 되었다. 땅끝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고 길이 끝나는 자리이기 때문인지 땅끝이라는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서 가자고 했다.

     

사실 끝없는 바다 위로 만들어진 도로를 달려가면 헤밍웨이의 집이 있다는 Key West는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한 곳이다. 그런데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만들어진 끝없는 다리 위를 달려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모래톱 위에 놓여진 도로는 좌우로 자란 난 나무들로 인해 바다풍경은 간간이 보이는 것이 흔한 바닷가 해변길 풍경이었다. 이런 실망감에 나에게 끊임없이 ”너는 왜 땅끝을 가는가? “라고 질문하며 달렸다.

     

사실 나는 가난한 농사꾼 자식이라 그런지 나는 매사에 목표지향적이면서 정복하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실망스러운 풍경에 중단하고 돌아가자는 의견에도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가자는 어느 분의 말에 동조하며 땅끝을 향해 달렸다. 이처럼 나는 땅끝을 갈 때마다 무엇인가를 정복했다는 성취감이 나로 땅끝을 향해 가게 하는 것 같다. 이렇게 3시간 이상을 달려 Key West에 도착한 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킬리만자로의 눈” 등 어마어마한 소설을 썼다는 헤밍웨이의 집(노인과 바다는 쿠바에서 쓰고 이곳에서 정리했다는 설도 있음)을 방문했다. 아이러니한 것이 내가 땅끝에서 만난 사람은 실존주의와 허무주의가 짙게 배어난 작품들을 쓴 어네스트 헤밍웨이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목표지향적인 사고를 무너뜨리는 허무주의를 땅끝에서 만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세상의 땅끝에서 경험하는 땅끝의 실존인가 보다. 인간의 정복욕구가 힘을 잃고 교만이 꺾이는 장소가 땅끝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 집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라는 허무감이 내 마음에 밑돌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허무감에 빠져드는 나에게 성경은 땅끝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행 1:8)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땅끝은 사람의 욕망이 멈추는 지점이고 중심이 흐려지는 지점이지만 복음이 시작되고 하나님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목표가 바뀌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땅끝에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한다”라고 했나 보다.

     

사실 나는 지리적 땅끝에만 서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도 삶도 땅끝에 서있다. 수많은 문제들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한계라는 땅끝에 서있다. 그리고 이 땅끝은 종종 나를 “왜”라는 질문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주님은 이 땅끝이 너와 내가 시작하는 곳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온 것으로 충분하다”가 아니라 “여기서부터 내가 일하겠다” 고 하시는 것 같다. 나는 모든 길이 끝나고 닫힌 땅끝에서 내가 무엇을 붙들고 왔는지를 점검해 본다.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으니….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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