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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연령대가 비슷한 분과 교제 중, 50대가 바라보는 30, 40대와 80,90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50대 입장에서 보면 30,40대가 낯설다. 소위 MZ 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것 같은 것이 우리와 다른 종족 같다. 80, 90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어머니를 비롯한 80, 90대는 고집이 센 것이 이 세대 또한 우리와 다른 종족 같다. 이처럼 내 입장에서 보면 우리와 다른 세대들이 불편 하다. 헤어지면서 교제하시던 분이 그래도 MZ 세대 가운데 착한 부분이 많다는 말에 다른 종족 같은 다른 세대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교회가 다음 세대를 위해 예배실을 건축 준비 중이다. 계획과 달리 permit도 늦게 나오고 건축업자 선정도 늦어지면서 성도님들에게 예배실 건축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못했다. 그런데도 고집 세다는 1세대들이 ”건축한다 “는 말만 듣고 헌금해 주신다. 어느 분은 남편 몰래 비상금으로 모았던 돈이라면서 헌금해 주셨다. 이제까지 남편이 주도하여 헌금했기에 처음으로 건축헌금 드린다면서 조금씩 조금씩 모아둔 생살 같은 만불을 건축을 위해 헌금해 주셨다.

     

또 어떤 분은 70세 생일을 맞아 조카들이 명품가방을 사준다는 말에, 현금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은퇴하고 이렇다 할 수입이 없어 소셜 시큐리티로 살기에 캐시 $5000달러가 얼마나 클까? 그리고 얼마나 가뭄에 소나기 같이 반가울까? 그런데도 건축헌금을 드리고 싶어 현금으로 달라고 했다고 한다. 헌금 후에 해맑은 표정 으로 소녀같이 웃으시며 기뻐하신다. 이것이 50대가 바라본 고집 센 1세대 이다. 그리고 이 고집으로 이들은 이민생활 속에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도 영적 유산을 흘러 보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풍성함이 고집 센 1세대들의 헌신의 열매이다. 고집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사랑이었는지 모르겠다.

     

30, 40대는 어떤가? 지금 교회의 예배와 교육등에서 헌신하고 있다. 이들이 없다면 예배가 어떨까? 각종 교육기관은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 이 순간도 충성하는 얼굴들이 내 생각 속에서 지나간다. 성숙함이 있는 얼굴들이고 고마운 얼굴들이다. 50대의 눈으로 보면 30·40대는 자기중심적으로 보이고, 80·90대는 지나치게 고집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어쩌면 다른 세대가 보는 우리 세대도 그들에게 불편한 세대라는 사실이다.

     

과연 우리 50대는 1세대에게 받은 것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세대로서 잘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문제는 어느 세대가 옳으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가족으로 함께 살아갈 가느냐에 있는 것 같다.

     

요즘 교역자들이 새벽마다 에스겔서를 나누고 있다. 특히 에스겔서에 나오는 심판을 나누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면서 이로서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하시면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겠다”라고 하신다(겔 39:25). 결국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교회의 미래를 책임지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세대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앞 세대에게 감사하고, 현재세대로서 다음 세대에게 믿음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저 세대는 왜 저럴까?”라고 말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저 세대를 통해 무엇을 하셨고, 또 무엇을 하실까?” 라고 물어야 한다.

     

나도 머지않아 80·90대가 된다. 어쩌면 오늘 내가 ‘다른 종족’이라고 말하는 80·90대의 모습이 30년 후에는 나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기에 세대의 차이를 불편해하기보다, 하나님이 각 세대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 하고 싶다.

     

그리고 80,90세대에게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30, 40세대에게는 “함께 갑시다”라고 말하고 싶다.

 
 
 

순종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딸아이가 엄마와 속닥이더니 이집트 카이로에 세워진 난민학교를 섬기기 위해 간다고 한다. 예전에 딸아이가 1년간 학생 선교사로 헌신한 적도 있고, 나 또한 인생 가운데 1년 정도는 선교지에서 봉사하는 것도 괜찮다 여겼기에 반대 없이 보내었다. 그런데 1년일 줄 알았는데 2년이 가고 3년이 가도 계속 이집트에 머무르더니 급기야 이집트에서 살겠다고 한다. 휴스턴에 오면 왠지 낯선 것이 이집트가 편하다면서 이집트에서 수단 난민 아이들과 살겠다고 한다. 그 순간 내 마음이 덜컥 내려앉으며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인생인가를 생각하니 답이 쉬웠다. 하나님 안에서 소명을 따라 살고, 이것이 가치 있다 여긴다면 이것이 행복이고 성공한 삶이 아닐까? 그런데 딸이 가치 있고 행복하다는데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딸아이의 선택을 응원하기로 했다.

     

2026년 비전집회가 시작되었다. 계속된 비전집회 속에서 처음에는 비전은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비전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더니, 요한 계시록 7장 말씀처럼 ”10일간 모든 민족, 모든 세대, 모든 언어가 모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내게 계속 순종을 말씀하신다. 그때마다 “딸아이를 축복하며 카이로에 보냈잖아요”라고 대답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듯이 나도 순종했다면서, 이민자로서 내 못다한 꿈을 이루어주리라고 여기던 딸이, 카이로에 있겠다고 할 때 쓰린 마음으로 응원했기에 모든 것을 순종 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주님은 계속 내게 순종을 이야기하신다.

     

그래서 “무슨 순종일까”를 되묻는데 문득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순종”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사실 나는 2년 전에 휴스턴을 떠나려고 하다가 떠나지 못한 후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이 불편하고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기에 두려웠다. 그래서 몸은 이곳에 있어도 늘 내 자리가 아니라 여겼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간파하시고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신다. 몸과 마음이 이 자리에 있는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주여! 주여! 주여”라고 외쳤다. 힘들어서 외쳤다. 그러다가 나를 이곳에 두시려면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왜 이리도 순종을 요구하실까? 이 순종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질문 속에 순종의 끝을 내가 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순종의 끝을 아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으면 된다.

     

비전집회가 마쳐지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여기에 서있고 살아가고 싶다.

     

홍형선 목사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 내 주위에서 사람들이 떠나고 나를 피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주위로 몰려들고 있는가? 나이를 먹으면서 한 가지 배우는 것은 모두에게 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삶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새벽예배에 에스겔서를 나누고 있는데, 에스겔서를 묵상하면서 이스라엘 주변국가들인 모압, 암몬, 두로 등이 심판 받은 이유는 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말이 중요하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배우는 것 중에 하나가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전에 분석되지 못했던 것들이 분석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보이고 생각하는 것들이 평가와 판단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이 분명 그런 의도는 아닐 텐데 한수 두 수를 넘어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향해 센스 있다고 여기고, 더 나아가 센스를 자랑한다. 이런 방식으로 나이를 먹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의 대다수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지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창조적 생각과 언어를 사용하신다. 이런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내 언어 속에 이미 하나님과 같은 창조적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도 현재이고 이삭에게도 현재이듯이 모세에게도 나에게도 현재라고 하신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약속의 말씀을 따라 현재 속에서 나를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내 경험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으로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입술이 비판과 정죄를 만들어 내는 통로가 아니라, 생명과 회복을 만들어 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힘을 잃고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얻고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나에게 “너의 주변 사람들은 네 말 때문에 살아나고 있느냐, 아니면 무너지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비전은 먼 미래를 보는 능력이 아니라 비전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내 주위의 사람들과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축복하고 계시듯이, 나도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축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내 주위의 사람들을 축복하는 이유는 내가 원래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나를 먼저 축복받을 자로 바라보시고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창조의 역사가 있었듯이 나도 축복을 선포할 때 우리의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다음 세대가 살아날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바로 축복의 언어를 통해 오늘도 이루어진다는 사실 앞에 2026 비전집회 에서는 사람을 평가하는 말을 멈추고 사람을 살리는 말, 축복의 언어만 선언하고 싶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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