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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배에 왔는데 오른쪽 볼 위에 머리카락 한 올이 있는 듯 간지럽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제거하려고 볼을 여러 번 문질렀는데도 여전히 간지럽다. 그리고 이 간지러움이 주기적이다 보니 신경이 쓰여 예배에 집중할 수가 없다. 이렇게 간지러움만 신경 쓰다가 새벽예배가 끝났다.

     

그런데 갑자기 불안하다. 혹시 신경에 문제가 있어 간지러운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나에게도 뇌졸증이 온 것인가?라는 불안감에 챗 GPT에게 “오른쪽 볼위가 머리카락 있는 것처럼 간지러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피로나 수면부족일 수 있고 대상포진 초기 증상일 수 있다고 한다.

     

“대상포진 초기 증상”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다음 주에 있을 알래스카 집회에 대한 걱정이 들면서 초기에 빨리 치료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교회 안에 계신 여러 의사분들 중 어느 의사분에게 상담하고 대상포진약에 대한 처방전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또 얼마 전에 이명기집사님이 대상포진으로 고생하셨는데 드시다 남은 약이 있을까? 집사님께 몇 시쯤에 전화 하면 좋을까? 등 온통 치료약 구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런 생각 속에서도 새벽기도 시간이니 먼저 기도하자며 억지로 기도하는데 기도내용도 온통 치료해 달라는 기도뿐이다. 그러다 간지러움이 멈추면 기도응답받은 듯 기뻐하다가 다시 간지러우면 또 치료를 위해 기도했다. 기도를 마친 후 말씀을 읽는데 오른쪽 눈에 줄이 보인다. 안 좋은 일은 무더기로 온다더니 대상포진에 눈마저 문제가 생겼나 보다. 그래서 눈동자를 돌려보니 오른쪽을 볼 때마다 줄이 보인다.

     

이런 불안감에 눈 상태를 보려고 밝은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눈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것이다. 눈가의 촉촉한 부분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다 보니 손으로 수없이 머리카락을 훔쳐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던 것이다. 대상포진도 아니고 눈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두어 시간 동안 쓸데없이 걱정만 했다는 것에 허탈감이 밀려왔다.

     

거울 앞에 서기전까지는 나 스스로 대상포진이라 여기고 걱정만 했던 모습에서 나의 영적상태가 보였다. 오른쪽 볼이 간지럽기에 열심히 머리카락을 털고, 챗 GPT에서 간지러움의 증상을 찾고, 병 낫기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듯이 나는 사역을 위해, 교회를 위해 열심이 있다.

     

새벽에 나오고, 늦게까지 열심히 사역하고, 교회를 위해 마음을 쓴다. 그런데 오늘 질문이 생겼다. 이 열심이 거울 앞에 선 열심인가, 아니면 내 생각을 붙들고 달리는 열심인가.

     

주님 앞에 서서 비추어 보지 않은 열심은 쉽게 불안과 상상에 끌려간다. 확인되지 않은 생각이 사실이 되고, 염려로 분주하다.

     

오늘 아침, 머리카락 한 올이 나를 가르쳤다. 먼저 거울이신 하나님 앞에 서라고, 먼저 말씀에 비추어 보라고, 먼저 사실을 보라고….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나를 세우는 것이 열심보다 먼저임을 다시 배운 새벽이었다.

     

홍형선 목사

 
 
 

내가 원해서 일수도 있고 상황에 이끌려서 일수도 있는데 나는 여러 곳의 땅끝을 방문해 보았다. 한국의 땅끝인 해남도 가보았고, 아프리카의 땅끝인 케이프 호프에도 서 보았고, 대만의 땅끝인 고구마 꼭지 같은 곳도 가보았다. 오늘은 미국의 최남단인 Key West에 가 보았다. 교단의 실행위원 모임이 마이애미에서 있었는데 실행 위 모임 중 누군가가 Key West에 갔다 오면서 차에서 토의하자고 하였고, 내가 적극 지지하여 8명 모두가 가게 되었다. 땅끝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고 길이 끝나는 자리이기 때문인지 땅끝이라는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서 가자고 했다.

     

사실 끝없는 바다 위로 만들어진 도로를 달려가면 헤밍웨이의 집이 있다는 Key West는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한 곳이다. 그런데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만들어진 끝없는 다리 위를 달려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모래톱 위에 놓여진 도로는 좌우로 자란 난 나무들로 인해 바다풍경은 간간이 보이는 것이 흔한 바닷가 해변길 풍경이었다. 이런 실망감에 나에게 끊임없이 ”너는 왜 땅끝을 가는가? “라고 질문하며 달렸다.

     

사실 나는 가난한 농사꾼 자식이라 그런지 나는 매사에 목표지향적이면서 정복하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실망스러운 풍경에 중단하고 돌아가자는 의견에도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가자는 어느 분의 말에 동조하며 땅끝을 향해 달렸다. 이처럼 나는 땅끝을 갈 때마다 무엇인가를 정복했다는 성취감이 나로 땅끝을 향해 가게 하는 것 같다. 이렇게 3시간 이상을 달려 Key West에 도착한 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킬리만자로의 눈” 등 어마어마한 소설을 썼다는 헤밍웨이의 집(노인과 바다는 쿠바에서 쓰고 이곳에서 정리했다는 설도 있음)을 방문했다. 아이러니한 것이 내가 땅끝에서 만난 사람은 실존주의와 허무주의가 짙게 배어난 작품들을 쓴 어네스트 헤밍웨이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목표지향적인 사고를 무너뜨리는 허무주의를 땅끝에서 만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세상의 땅끝에서 경험하는 땅끝의 실존인가 보다. 인간의 정복욕구가 힘을 잃고 교만이 꺾이는 장소가 땅끝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 집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라는 허무감이 내 마음에 밑돌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허무감에 빠져드는 나에게 성경은 땅끝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행 1:8)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땅끝은 사람의 욕망이 멈추는 지점이고 중심이 흐려지는 지점이지만 복음이 시작되고 하나님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목표가 바뀌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땅끝에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한다”라고 했나 보다.

     

사실 나는 지리적 땅끝에만 서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도 삶도 땅끝에 서있다. 수많은 문제들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한계라는 땅끝에 서있다. 그리고 이 땅끝은 종종 나를 “왜”라는 질문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주님은 이 땅끝이 너와 내가 시작하는 곳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온 것으로 충분하다”가 아니라 “여기서부터 내가 일하겠다” 고 하시는 것 같다. 나는 모든 길이 끝나고 닫힌 땅끝에서 내가 무엇을 붙들고 왔는지를 점검해 본다.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으니….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홍형선 목사

 
 
 

창립 35주년을 맞은 투산 사과나무교회 창립기념임 일을 맡아 권사님과 안수집사님들(총 10명)의 임직식이 있어 다녀왔다. 4명의 안수집사님 대상자들의 인터뷰가 있었고 시간 시간 식사라는 빌미로 많은 성도님들과 교제했다. 교제하면서 한 사람의 목회는 혼자서 걷는 외로운 걸음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의 고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안수집사님 대상자와 인터뷰하며 “불과 8년 전, 10년 전만 해도 오늘의 사과나무 교회가 있게 될 줄 알았냐”며 서로 감사했듯이 8년 전만 해도 사과나무교회는 풀 한 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척박함이었다. 그런데 젊은 김철휘목사님이 부임하면서 교회가 서서히 일어나더니 한 번에 10명이나 종신제직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분이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고난의 의미를 알았다고 한다. 아들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줄 알고 그동안 아들을 미웠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예수님 닮게 하시려고 아들을 사용했다면서 오히려 아들이 자기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겠냐며 눈시울을 적신다. 고난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이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 목사님이 설교를 넘어 이렇게 살았나 보다. 또 어느 분은 예수님 닮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 자기는 목사님 닮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하는 사람을 찾아가 안아주는 목사님을 보면서 저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라 여겨졌다며 목사님이 사시는 대로만 살기로 했다고 한다. 엄청난 고백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고 한다. 얼핏 보면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며 자기 자신이 기준 같다. 교만한 말 같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나를 보지 말고 내 삶을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를 보라는 믿음의 요청이다.

     

누군가가 성도들은 들려진 설교보다 설교자의 삶을 기억한다고 했다. 기도하라는 말 보다도 기도하는 목사의 무릎을 기억하고, 섬기라는 목사의 말보다도 섬기는 목사의 손을 보고, 사랑하라는 말보다도 사랑해서 흘리는 목사의 눈물을 기억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를 본받는다는 것은 목사의 삶을 넘어 목사가 붙들고 있는 예수님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님들의 고백을 들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나는 한 교회를 20년 이상 섬기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말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가 성장하면서 이제는 몸으로 하는 사역들이 줄어들고 있다. 진짜 내가 전하는 말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 그러기에 나는 성도들 위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라 성도들보다 한 걸음 먼저 십자가 앞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나의 등을 보면서 “저 길이구나”하며 따라오는 것이 목회라는 것이다.

     

투산 사과나무교회를 통해 목회를 뒤돌아보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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