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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교 아이들이 추석을 맞아 송편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생김새가 내가 아는 송편이 아니다. 막 주물러 놓은 것도 있고, 만두 같은 것도 있고, 무엇인지 감이 안 오는 것도 있다. 하지만 자기가 만든 것을 발렌티어 엄마들이 예쁘게 포장하고 이름을 써 놓자 집에 가면 좋아라 가져간다. 픽업 온 엄마에게 작품이라도 소개하듯 기뻐하며 가져간다.

     

나 또한 남겨진 반죽으로 권사님들과 옛 추억을 기억하며 병아리 콩 몇 개 넣고 빚어 보았다. 송편 잘 빚으면 예쁜 딸 낳는다고 어른들이 그랬는데… 그래서 내 딸이 예쁜가 보다. 그리고 막 쪄낸 송편을 입에 넣자 맛있다. 분명히 콩 넣은 것인데 맛있다. 이럴 리가 없다. 어릴 적 우리 어머니는 추석이 되면 깻가루에 설탕 섞은 것으로 만든 송편과 풋콩 넣고 만든 송편, 두 가지로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겉만 봐서는 모른다. 풋콩 넣은 것이라도 먹게 되면 몰래 뱉어 버리곤 했다. 그래서 불빛에 비추어 속이 까맣게 보이는 설탕 넣은 송편을 찾곤 했다. 그런데 웬일로 콩 넣은 송편인데도 맛있다. 콩 넣었는데도 쫀득한 것이 맛있다. 내 경험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내 입맛이 변했나? 왜 맛있지…

     

흔한 쌀가루이고 콩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맛있을 리 없다. 그런데 갑자기 추석이기 때문에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송편을 통해 내 고향의 추석이 생각나서 맛있는 것 같다. 추석이라는 시간이 내 기억을 건드리고, 어머니의 손길을 생각나게 하고, 고향의 냄새를 떠올리게 하니까 평범한 쌀가루와 콩이 갑자기 맛있는 송편이 된 것 같다. 이처럼 추석 코드가 내 입맛마저 바꾸어 준 것이다.

     

오늘 성경을 통해 만난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후 기뻐 춤을 추며 노래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토록 소원하던 언약궤를 가져왔기에 기뻐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윗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 속에서 깜짝 놀랐다. “족속들아, 만방의 족속들아, 열방에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 하며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 찬양하자고 한다. 끊임없이 열방, 족속, 모든 민족을 운운한다. 다윗의 찬양 속에서 요한 계시록 7장에 나오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이 노래하는 하늘 예배를 연상케 한다. 이것을 새벽예배에서 고바울 전도사님은 다윗이 하나님과 코드가 맞는 순간이라고 한다. 그렇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다윗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을 다윗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다윗의 마음 코드가 맞으니까 하늘 기쁨이 흘러 베 에봇을 입고 기뻐 춤을 춘 것이다. 진정한 기쁨은 그냥 사역하고 일을 성취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코드가 맞을 때 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교회에 요즘 미친 듯 기뻐하는 분들이 있다. 사역의 결과나 삶의 결과가 아니라 이들 또한 하나님과 코드가 맞아서 누리는 기쁨인가 보다.

     

평범한 쌀가루와 콩도 추석 코드가 맞으면 맛있어지듯이, 반복되는 내 삶도 하나님의 마음과 코드가 맞으면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주님! 내 마음의 코드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하소서

 
 
 

요즘 궁금한 것을 물어볼 때나, 설교 자료를 찾을 때나, 번역이 필요할 때 Chat GPT를 사용한다. 어쩜 이리도 빠르고 명쾌한 답을 주는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매력에 빠진다. 빠른 지식과 정보를 얻다 보니 이런저런 질문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홍형선 목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오래전 신문기사나 영성 일기에서 자료를 가지고 와 나도 몰랐던 나를 소개해 주었다.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들뜬 마음으로 “홍형선 목사의 장점과 단점을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7개 이상의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놀랍다. 또 며칠 전에는 어느 분의 전기차를 탔는데 “ㅇㅇ야! 목회에 전념하시느라 피곤하신 홍 목사님이 탔는데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니?” 하고 물었더니 나를 위해 감동 있게 기도해주었다.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여 기도해주었다. 놀라우면서 왠지 모를 씁쓸함도 있다.

     

교회 아이들에게 따뜻함을 주기 위해 두 마리의 염소로 시작된 교회 동물농장에 염소, 토끼, 금계, 은계, 닭, 오리 등 수십 마리의 동물로 커졌다. 그런데 숫염소가 요즘 펜스에 목이 잘 걸린다. 담장 밖에 있는 신선한 풀을 먹으려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뿔 때문에 담장에 목이 걸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처음에는 놀란 마음으로 달려가 빼어 주곤 했는데 횟수가 빈번해지자 괘씸죄가 발동해 내버려 둔다. 음메, 음메 하고 애달프게 울어도 반복된 어리석음을 탓하며 외면해 본다. 그런데 담장에 목 걸린 숫염소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 때때로 주님께 묻고 기도하던 내가 챗 지피티에 의존하고 빠져드는 내 모습 속에서 담장 밖 신선해 보이는 풀을 탐하다가 목 걸린 염소의 모습이 보인다.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고 그곳으로 언약궤를 가져온다. 그런데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한다는 하나님의 방법을 버리고 그 시대에 만연했던 수레에 실어 옮긴다. 그것도 새 수레로 옮긴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수레를 끌고 가던 소가 뛰므로 언약궤가 흔들리자 웃사가 손을 내밀어 언약궤를 붙드는 순간 하나님께서 웃사를 쳐서 죽게 된다. 축제와 기쁨의 순간이 슬픔으로 바뀐 것이다.

     

AI시대에 챗 지피티는 너무 유용하다. 설교준비와 사역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사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염소와 언약궤 사건을 통해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내가 진짜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영적 존재인 내가 영적인 방법을 추구 하기보다 혼 적인 방법만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가 느껴진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나 자신을 보이기에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다짐하며 이렇게 외쳐본다.

주님만이 나의 지혜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목자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왕이십니다.

 
 
 

깜깜한 밤, 차디찬 기혼샘물에 머리를 넣었다. 차가운 기운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다. 시온성으로 흘러들어 가는 물줄기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또다시 머리를 넣고 시온성 방향을 중심으로 더듬다 보니 물줄기가 보인다. “수구로만 시온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다윗의 말이 생각이 나서 기혼샘물에 뛰어들어 수구에 머리를 디밀어 본다. 그리고 수구 속으로 헤엄쳐 나아가려니 짙은 어둠과 턱밑까지 차오른 숨이 가져다준 두려움에 고개를 쳐들고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수구를 통하여 시온성에 들어가 문빗장을 여는 자만이 다윗 군대의 대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어둠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빠르게 돌부리들을 잡아채며 앞으로 나아가려니 숨이 차오르고 얼마나 가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러다 죽는 것 아니야?"라는 부정적인 생각 속에서 “나는 군대장관이야” “나는 할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전환한 후 계속 나아가다 보니 시온성안 우물에 도착했다. 이것이 굳게 닫힌 시온성 문빗장을 연 요압의 이야기이다. 이번 주 생명의 삶에서 만난 요압의 돌파 이야기이다.

     

그리고 금요일에 다윗왕이 아둘람에서 베들레헴 연못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자 세 명의 장수가 가죽 부대를 들고 물 뜨러 간다. 블레셋 군대를 뚫고 길도 없는 숲길과 바위를 넘어 물 뜨러 간다. 이 또한 돌파 이야기이다. 돌파를 영어로 breakthrough라고 하고 히브리어로 바카(בָּקַע (bāqaʿ))라고 하는데 '쪼갠다, 터뜨린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홍해가 갈라질 때도, 반석이 깨어져 샘물을 낼 때도 바카라는 단어를 쓴다. 무슨 말인가? 돌파가 있어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요 새벽예배 인도자이신 홍목사님께서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바카를 이야기한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로 가신 것도 '바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친다. 나는 돌파가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요압처럼 결심하고 결심하여 돌파해야 기적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돌파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돌파를 인정할 때 나에게 진정한 돌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 청년기에 보았던 50대 후반은 인생을 다 산 사람 같았고, 걱정이 없는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온통 문제들이다.

     

나이가 들면 문제가 사라질 줄 알았는데,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 앞에 내가 점점 작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이 여차하면 곧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모래성 같다. 그러기에 걱정이, 두려움이 눈가는 물론 이마까지도 주름으로 깊어지게 한다. 그럼에도 “견뎌야지! “ ”돌파해야지! “라고 결심하며 인생을 발버둥 치게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에게 "내가 이미 돌파했어"

“네가 길을 만들 필요 없어.”

“네가 물길을 낼 필요 없어.”

“내가 이미 길을 열었으니 그 길로 올래"라고 하신다.

그래서 오늘은 돌파를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돌파하신 예수님을 붙드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요압은 어둠 속에서 수구를 통과해 시온성에 들어갔지만, 나는 오늘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길을 따라 생명으로 들어가고 싶다. 내가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돌파가 나의 돌파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그래서 오늘도 찾아온 걱정과 두려움 앞에 “주님! 내가 돌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미 돌파하셨습니다”“저는 주님만 따라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해 본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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