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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린다. 갑자기 찾아온 폭우 때문에 50분 정도 늦게 출발하더니 구름을 헤치고 비상해서 그런지 위아래로 심히 흔들린다. 흔들림에 물건들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도 모르게 의자를 꼭 부여잡았다. 그러면서 ”요즘 비행기 사고가 많은데 “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비행기의 흔들림에 본능적으로 의자는 꽉 붙잡았지만 죽음은 두렵지가 않았다. 아니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믿음의 선배들이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보여도 내 주님 이제나 오시렵니까 “라고 외쳤다더니 나도 주님 만날 기대감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서인가? 삶이 버거워서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민 36장에 보면 슬로브핫 딸들이 가나안 동편에서 광야에서 죽은 아버지의 기업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한다. 아들이 없다고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으면 아버지의 이름도 끊어지고 자기 가문도 사라진다면서 기업을 요구한다. 그러자 이들이 속한 므낫세 지파의 족장들이 반문을 제기한다. 이 딸들에게 땅을 주었다가 이들이 다른 지파 남자들에게 시집가면 자기 지파의 땅이 줄어들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경계가 흐트러진다는 것이다. 결국 모세는 슬로브핫 딸들에게 아버지의 기업을 주되 결혼은 자기들이 속한 므낫세지파의 남자들과만 결혼하라고 한다.

     

성경은 어찌 보면 이 사소한 문제를 민수기 마지막 장에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이들이 어디에 있는가? 요단 동편이다. 아직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않았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가나안족속들과 7년 이상 정복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슬로브핫 딸들과 므낫세 지파의 족장들은 마치 가나안땅에 들어가 기업을 분배하는 자리에 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슬로브핫 딸들이나 이스라엘 족장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에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 안수받은 지가 28년이 되었다. 휴스턴 순복음교회를 섬긴 지는 22년이 되었다. 솔직히 많은 부분에서 열정이 식어간다. 타성에 젖어가는 것 같다. 이러다가 성도님들에게 상처 주는 목회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무슨 말인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목사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만 안된다는 말이다. 그날을 맞이하는 심정으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슬로브핫 딸들이 오늘을 그날처럼 살았듯이 나도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이번 한 주간 “허용”이라는 단어를 묵상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향해 가던 중 요단 동편 길르앗 산지의 푸르름과 풍요를 보았다. 그리고 이 풍요로움에 매료된 르우벤지파, 갓지파와 므낫세 반지파가 이 땅을 기업으로 달라고 간청한다. 분명 하나님은 가나안의 경계를 북쪽으로는 호르산이고, 남쪽으로는 신광야이고, 서쪽은 대해이고, 동쪽으로는 염해라고 규정해 주었음에도 약속의 땅이 아닌 길르앗산지를 달라고 떼를 쓴다. 그리고 이 간청함에 하나님은 허용하신다. 이외에도 하나님은 왕을 달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간청과, 발람선지자의 간청에도 허용하신다. 이렇듯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도 간청하면 허용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내 삶에도 허용하심으로 다가온 것이 많다(가정, 이민, 목회..). 나는 기도응답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허용하심인 것이 많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허용하심이 축복인가? 허용하심으로 요단동편 길르앗산지에 정착한 두 지파 반은 계속된 아람나라와 암몬의 침공으로 고생고생하다가 결국 앗수르의 침략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도 응답으로 허락된 왕 때문에 고생 고생만 하다가 나라는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다. 그렇다면 허용하심이 진정한 응답이 되고 축복이 되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교회 연못이 지저분하다. 온갖 쓰레기가 갈대 사이에 쌓여있고, 갈대는 뻗을 대로 뻗어 연못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교회의 자랑스러운 연못이 흉하게 보인다. 그래서 청소하기로 마음먹고 해가 진후 낚시옷을 입고 갈대를 벨 낫을 들고 연못으로 갔다. 내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과 진흙뻘을 헤집고 다니며 쓰레기(축구공 3개, 야구공, 고무공, 물병, 컵 등)를 줍는데 큰 쓰레기 봉지 가득이다. 2미터 이상 자란 갈대들은 왜 이리도 무거운지 온몸에서 땀이 흐른다. 거기에다 낚시옷 어딘가가 찢어졌는지 비린내 나는 물들이 스며들더니 몸이 무거워진다.

     

사실 그 누구도 나에게 연못청소를 하라고 한 사람이 없다. 연못청소가 영혼구원이나 교회성장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연미가 있고, 깨끗한 분수가 있는 교회 연못을 자랑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또한 큰 틀에서 “허용”이다.

     

의욕 있게 달려들었지만 깊은 진흙 뻘 속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기다 보니 힘이 들었다. 힘이 드니 짜증이 난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봐주었으면 하는 공로자의 의식이 있었는데, 힘이 드니 ”꼭 내가 해야 하나“ 라는 생각 속에 여러 얼굴들이 떠오르며 비교의식이 지배한다. 그 순간 어떻게 하면 허용이 축복이 될 수 있을까? 허용하심 속에 공로자 의식과 비교의식 속에 빠지지 않고 축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속에 “주님! 당신이 사랑하는 신부들이 깨끗한 연못을 보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주님! 저에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라며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시선을 두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다 내 안에서 기쁨이 흐르더니 기쁨이 나를 감싼다. 그리고 진흙뻘속에 뒹구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허용하심이 축복이 되려면 축복으로 다가온 것에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허용하신 하나님께 시선을 두어야 함을 배우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나를 시궁내 나는 진흙뻘에서 공로자의식과 비교의식으로 뒹굴게 놓아두지 않고 허용하심의 축복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주님! 감사해요.

     

     

홍형선 목사

 
 
 

어린 시절 가을날에는 먹을 것이 참 많았다. 학교에서 오는 길에 감나무 밑에 가면 나무에서 떨어진 빨간 홍시가 있었고, 밤나무 밑에 가면 알밤들이 있었다. 길가 옆 무밭에서 팔뚝만한 무 하나를 뽑아 손톱으로 껍질을 돌려 벗긴 후 한입 베어 먹으면 매콤함 속에 흐르는 단맛은 갈증 해결을 넘어 주린 배를 채워 주곤 했다. 이렇듯 가을은 풍성하다.

     

오늘 큐티 말씀에 보면 장막절을 지키라고 한다. 장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이지만 우리 달력으로는 10월로 가을걷이가 다 끝난 후 안식하는 절기이다. 가을 내내 땀을 흘리며 수확한 모든 곡식을 창고에 들인 후 넉넉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절기이다. 그런데 장막절을 지키는 방법이 독특하다. 장막절이 되면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들로 나가서 하늘이 보이는 초막을 짓고 그곳에 살면서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것이다.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가 아니라 돌이 찌르는 땅바닥에서 자고 씻을 수 없는 초막에서 살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공급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초막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장 풍요로울 때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기억하며,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 초막에서 보내라는 것이다. 지난 금요예배를 섬겨주신 연광규 목사님께서 이런 말을 하신다. 연목사님은 탈북자로 먹고살기 위해 중국에 나왔다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만난 후 북한에 다시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 공산당에 잡혀서 모진 고문 끝에 감옥에 갔다 오신 분이다. 이런 목사님께서 ”신앙의 적은 핍박도 아니고, 감옥도 아니고, 풍요라고 하신다" 무슨 말인가? 북한에서 고문받고 있을 때보다도 풍요로운 한국과 미국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며 살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다.

     

요즘 내 인생은 가을인 것 같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가을인 것 같다. 예전과 다르다. 주일을 두 번 비우고 한국에 다녀왔는데도 교역자님들과 교회 리더십들이 교회를 잘 이끌고 계셨다. 내가 심방 하지 않고, 더이상 청소하지 않아도 교회가 잘 돌아간다. 목회 가운데 이런 시간들이 올까 했는데 풍성한 가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풍요로운 계절에 장막절을 지키라고 하신다. 들로,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하신다. 광야로 가서 초막을 짓고, 제물을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가 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초막은 어디에 짓고 어떻게 초막절을 지켜야 할까? 어디에 초막을 지어야 하나님이  실제가 되고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있을까? 나에게 광야로 느껴져 은근슬쩍 넘어서 피해 가고 싶은 곳이 어딜까?

     

금요예배이다. 22년 이상 금요예배를 드리지만 매번 영적부담을 느낀다. 그래서 가능하면 안 드리고 싶다. 그런데 풍요 속에 초막으로 갈 때 하나님이 실제가 된다고 한다. 금요예배에 하나님이 실제로 임재하길 소원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초막으로 가야겠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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