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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일기. 12월 6일

     

무게감....

며칠 전 성도님들 몇분과 모임을 갖던 중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앉자 한분 한분이 내 등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신다. 그런데 한분 한분의 손이 얹힐 때마다 무게감이 느껴진다. 한분 한분이 나와 교회의 미래를 축복하며 기도해 주건만 나는 무겁다.

월요일에 라이드를 갔다가 근처에 있는 어느 성도님 가게에 심방을 갔다. 반가워하며 새롭게 시작한 두피 마사지를 받고 가란다. 간청도 하고 새롭게 시작된 사업이기에 알고 축복하고 싶기에 의자에 누웠다. 두피뿐 아니라 얼굴도 케어받으라 한다. 일이 커지는 것 같지만 저항 못하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많은 절차 후 내 얼굴에 얇은 천 같은 것이 덮인다. 한장, 두장 몇장이 덮인다. 이것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러더니 시원한 무엇인가를 입과 코를 제외하고 얼굴 전체에 두껍게 바르면서 피부에 스며들어야 하니 20분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얼굴이 무겁고 숨이 막혀온다. 요즘 이렇듯 많은 곳에서 무게감을 느낀다.

     

내 등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말은 안 했지만 이들이 꿈꾸는 교회가 느껴진다. 그런데 나에게는 달려갈 힘이 없다. 지난 20년간 달리다 보니 숨도 차고 1%의 에너지도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예배당 증축 속에 어쩌다 보니 휴스턴 교회연합회 회장이 되고 교단에서는 총회장의 사임으로 총회장대행이 되었다. 이 또한 무겁고 숨이 막혀온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도망치고 싶다.

     

오늘 큐티말씀에 보면 사도바울은 “위엣것을 찾으라, 위엣것을 생각하라”라고 외친다.

어쩌면 골로새교인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면서 동시에 바울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감옥이라는 무게감 속에서 살기 위해 자기에게 외치는 소리 같다. 그래서 나 또한 하루를 “위엣것을 찾고 생각하자”며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의 삶 속에서 위엣것을 잊게 하는 또 다른 무게감들이 시간 단위로 찾아왔다. 그 순간마다 “위엣것을 찾고 생각하라”를 적용하며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다“ 면서 무게감과 맞섰다.

그러자 무게감이 녹아지며 평강이 느껴졌다.

     

등위에 올려진 성도님들의 손이 처음에는 무거웠지만 기도가 끝날 때는 동역의 손이 느껴졌다. 주님과 함께하는 동역의 손들이다. 그러고 보면 내게는 많은 동역의 손들이 있다. 그러기에 감사하고 기대가 된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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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일기. 12월 1일

요즘 아내와 단둘이서 비행기 여행을 자주 한다. 혼자서 비행기를 탈 때면 어떤 자리에 앉게 될까? 통로 쪽 자리를 앉아야 하는데 가운데 자리나 창가 쪽 자리를 앉게 되는 것은 아닐까? 라며 매번 걱정한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비행기를 타면 아내가 가운데 자리를 앉기에 늘 통로 쪽은 내 몫이다. 그러기에 자리에 대한 고민 없이 비행기를 탄다. 그런데 아내와 함께 하는 비행기 여행이 진짜 좋은 이유는 아내와 단둘만의 교제가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대화하는 것이 좋다. 또 비행기 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어깨를 의지하여 가다 보니 아내의 어깨에서 따뜻함이 느껴지며 교감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그 좁은 비행기 좌석이 좁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교감 때문인지 버지니아에서는 공원을 걷다가 아내의 손을 은근슬쩍 잡아 보았다. 그러면서 50대 남녀가 손잡고 걷는 모습을 보면서 누가 “불륜”이라고 생각하겠다는 생각과 불편함이 밀려와 금세 잡았던 손을 놓았다. 휴스턴에 있으면 각자의 삶이 분주하여 함께함이 힘든데, 비행기를 기다리며 대화하고, 좁은 비행기 안에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앉고, 어깨를 맞대고 가다 보니 교감이 생긴다.

하나님과의 교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늘 은혜가 충만하여 주님과 교제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주님과 어쩔 수 없이 좁은 공간에 들어갈 때가 있다. 삶의 짐 때문에 주님을 찾아 외쳐야 할 때가 있다. 도와달라고 외쳐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외치다 보면 주님의 사랑이 따스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을 더 갈망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삶의 짐이 무거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주님이 보이고 살아갈 이유가 보인다.

요즘 큐티 본문인 골로새서에 보면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한다. 예수님과 자신이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고백을 로마 감옥에서 한다. 좁은 공간에서 한다. 좁은 공간에서 예수님과 자신이 살갗이 부딪힘을 넘어 하나임을 본 것이다.

어쩌면 문제가 문제로만 보이는 이유는 주님의 살과 부딪힘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삶의 좁은 공간에서 내 삶을 좁은 공간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따스한 살갗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좁은 공간에서, 문제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좁은 공간으로만 끝이 난다. 이것은 손해 보는 것이다.

50대 중반, 사역의 자리도, 아빠의 자리도, 남편의 자리도 좁은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갈망할 때다. 그래야 내 인생이 손해 보지 않는다.

홍형선 목사

영성일기. 11월 24일

추수감사절을 맞아 어느 성도님 가정이 쌀 100포를 도네이션 해주셔서 그중 일부는 교인 체육대회 선물로 사용했다. 쌀 한포를 안고 좋아하는 모습들이 참 보기 좋았다.

이처럼 많은 분들이 추수감사절을 맞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감사를 고백했다. 그런데 어느 분의 추수감사헌금이 $1,095이다. $1,000도 아니고 $1,100도 아니고 $1,095이다. 궁금하던 차에 우연히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떻게 감사를 고백할까 하다가 어려서 미션스쿨에서 매일 감사하라고 배웠던 말이 생각나서 첫째 해에는 하루에 1불씩 $365를 드리고, 둘째 해에는 2불씩 $730을 드리고, 올해는 세번째 해로 매일 삼불씩 365일을 계산하여 $1,095을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은퇴하는 날까지 매년 $1씩 올릴 것이라고 한다. 참 감동적인 고백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동행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인정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백은 받고있는 사랑을 알 때 가능하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받을 은혜가 아니라 받은 은혜이고 받고있는 은혜이다. 마치 시편 기자가 감사함으로 주님의 임재 앞에 나간다고 고백하면서 그 감사 이유를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내가 그의 백성이고 그의 기르시는 양”(시 100:3)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듯 말이다.

오늘은 추수감사절 다음날이다. 우리 교회에 유일하게 새벽예배와 금요예배가 없는 날이다. 내게는 편하게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이다. 그런데 습관 때문인지 일찍 눈이 떠졌다.

그래서 예배당 증축도 궁금하고 교회 주변에 나무도 심기 위해 교회에 나가면서 어느 장로님과 집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식목일도 아닌데 30여개 이상의 구덩이를 파고 아파트와 경계하는 교회 울타리 주위에는 소나무를 심고, 운동장 주위에는 갈대를 심었다. 소나무를 심으면서 '잠깐 30cm 밖에 안되는 이 나무가 언제 커서 5m, 10m 이상으로 자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무를 심는 장로님, 집사님은 볼 수 있을까? 나는 그때까지 휴스턴순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까?

확실한 것은 그날을 내가 보고 누리기 위해 심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에 나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땀 흘림의 노동이 기쁘다.

참 이상하다. 감사해서 내 나름의 고백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또 다른 감사를 누리게 하신다.

그렇다. 내게 필요한 것은 받을 은혜가 아니라 받고있는 은혜를 아는 것이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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