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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35주년을 맞은 투산 사과나무교회 창립기념임 일을 맡아 권사님과 안수집사님들(총 10명)의 임직식이 있어 다녀왔다. 4명의 안수집사님 대상자들의 인터뷰가 있었고 시간 시간 식사라는 빌미로 많은 성도님들과 교제했다. 교제하면서 한 사람의 목회는 혼자서 걷는 외로운 걸음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의 고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안수집사님 대상자와 인터뷰하며 “불과 8년 전, 10년 전만 해도 오늘의 사과나무 교회가 있게 될 줄 알았냐”며 서로 감사했듯이 8년 전만 해도 사과나무교회는 풀 한 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척박함이었다. 그런데 젊은 김철휘목사님이 부임하면서 교회가 서서히 일어나더니 한 번에 10명이나 종신제직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분이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고난의 의미를 알았다고 한다. 아들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줄 알고 그동안 아들을 미웠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예수님 닮게 하시려고 아들을 사용했다면서 오히려 아들이 자기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겠냐며 눈시울을 적신다. 고난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이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 목사님이 설교를 넘어 이렇게 살았나 보다. 또 어느 분은 예수님 닮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 자기는 목사님 닮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하는 사람을 찾아가 안아주는 목사님을 보면서 저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라 여겨졌다며 목사님이 사시는 대로만 살기로 했다고 한다. 엄청난 고백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고 한다. 얼핏 보면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며 자기 자신이 기준 같다. 교만한 말 같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나를 보지 말고 내 삶을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를 보라는 믿음의 요청이다.

     

누군가가 성도들은 들려진 설교보다 설교자의 삶을 기억한다고 했다. 기도하라는 말 보다도 기도하는 목사의 무릎을 기억하고, 섬기라는 목사의 말보다도 섬기는 목사의 손을 보고, 사랑하라는 말보다도 사랑해서 흘리는 목사의 눈물을 기억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를 본받는다는 것은 목사의 삶을 넘어 목사가 붙들고 있는 예수님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님들의 고백을 들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나는 한 교회를 20년 이상 섬기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말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가 성장하면서 이제는 몸으로 하는 사역들이 줄어들고 있다. 진짜 내가 전하는 말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 그러기에 나는 성도들 위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라 성도들보다 한 걸음 먼저 십자가 앞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나의 등을 보면서 “저 길이구나”하며 따라오는 것이 목회라는 것이다.

     

투산 사과나무교회를 통해 목회를 뒤돌아보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홍형선 목사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그분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며 죄와 싸우는 존재들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는 여전히 넘어짐과 실패, 그리고 반복되는 죄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죄를 ‘작은 죄’와 ‘큰 죄’로 구분하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건 누구나 하는 실수잖아” 하며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시선에서도 죄에 크고 작음이 존재하는 것인가…

     

성경은 죄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한복음 16장 9절)

     

이 말씀은 죄가 단순히 도덕적인 실패나 윤리적인 잘못을 넘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죄의 뿌리는 행동 이전에 믿음의 문제이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는 마음의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모든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의 불순종이며,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죄는 동일하게 죄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크고 작은 죄가 있을 수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죄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영적 현실입니다. 더 나아가 죄는 생물처럼 자라고 번식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고 사소해 보였던 죄가 점점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결국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며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작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결국 더 큰 영적 무너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의 현장 안에서도 죄가 교묘하게 숨어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각한 아이러니는 사탄이 자기를 가장 안전하게 숨길 장소를 우리가 명백하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찾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수많은 악마적 행위를 위해 이용된다. 그것이 사탄의 가장 안전한 가면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깊은 영적 경각심을 줍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중심에 자기 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비교, 교만, 영적 우월감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단순한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과녁에서 벗어난 모든 마음의 상태와 삶의 방향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믿음으로 죄의 열매가 아니라, 죄의 뿌리를 다루는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 죄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내 마음이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를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삶이며,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와 동기만큼은 순수해야 합니다. 비록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넘어졌음을 깨달을 때에는 부끄러워할 줄 알고, 솔직히 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주간도 나 자신을 돌아보며, 정결한 영혼과 정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여정인 줄 믿습니다.

      이권율 목사

 
 
 

시리아민족을 섬기기 위해 단기선교 가기로 하신 김남철 안수집사님께서 선교 떠나기 몇일전에 쓰러지셨다. 함대별 찬양제에서 찬양을 마치신후 쓰러지셨다. 심장에 장착한 피스메이커(pacemaker)와 심장박동이 맞지않아 쓰러지신 것이다. 결국 911이 와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다음날 병원을 방문했더니 아마도 이번 선교여행은 못 가실것 같다고 한다. 나 또한 당연히 못가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 퇴원하고 바로 주일 예배에 오셨다. 예배 내내 눈물을 흘리며 예배하신다. 예배가 끝난후 부부가 찾아와 선교지에 가겠다고 하신다. 안가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것 같고, 타협함이 나중에는 예수님마져 배반할것 같다며 가겠다고 하신다. 죽을 인생이었다면 4일전에 죽었다며 선교지에서 죽어도 좋다고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도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신다. 그 흐르는 눈물에서 돌파하고자 하는 믿음이 보인다. 지금 우리 교회는 돌파가 필요하다. 수많은 도전과 세상의 가치를 뚫어내는 돌파가 필요하다. 그런데 집사님의 고백속에 우리교회의 돌파가 보인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하여 떠나는 아브라함을 묵상하며 파송기도해 주었다.

     

이번주 생명의 삶에서 요셉을 만났다. 성경은 요셉의 인생에서 있었던 4번의 순종을 소개한다. 요셉은 임신한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오라(마1:20,21)는 말씀과,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라(마2:13)는 말씀과, 애굽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마2:19,20)는 말씀과, 갈릴리 지역 나사렛으로 가라(마2:22,23)는 말씀에 순종한다. 그 어느것 하나 쉽지않다. 당시 혼전 임신한 여인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 그런데 내 씨도 아닌데 데려오란다. 애굽으로 피신하여 이제 정착하여 살만한데 이스라엘로 돌아 가라고 한다. 그것도 욥바나 예루살렘이 아닌 시골마을로 돌아가란다. 요셉 입장에서는 그 무엇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짜증부터 났을것 같다. 그런데 요셉의 아름다움은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순종은 예언의 성취를 가져 왔다는 것이다.

     

김남철 집사님 부부는 왜 우셨을까?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감사와 헌신의 의미도 있겠지만 아마도 내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하기 위한 눈물 이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그 눈물은 감정이 복바쳐서 흘린 눈물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주권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주님이 부르시기에 가는 길 앞에서 흘린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순종의 눈물이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나 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물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시84:5,6)”

     

여기에 보면 눈물의 골짜기는 피해야 할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샘을 터트리시는 자리이고, 시온의 대로를 만드는 자리라고 한다. 지금 나와 우리 교회가 필요한 것은 어떤 전략이나 계산이 아니라 이 눈물의 순종이다. 이해되지 않고 설명이 되지 않아도 맡기는 순종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내가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물어본다.

     

주님!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신다면 그곳에 샘을 내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고 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와 우리교회가 눈물로 예언을 성취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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