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Search

"두려움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믿음의 여정 가운데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도, 말씀을 오래 붙들어 왔어도, 두려움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두려움은 신앙의 수준을 가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알려진 사람도,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온 사람도, 어느 날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두려움 앞에 흔들립니다. 그것이 인간의 연약함이고, 우리 모두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더욱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두려움은 처음에는 작은 불씨처럼 찾아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재 내가 마주한 상황에 대한 깊은 염려로 번져갑니다. 그리고 그 염려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두려움이 단순한 감정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믿음을 서서히 잠식하고, 하나님보다 눈앞의 문제를 더 크고 무겁게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용기'라고 답할 것입니다. 두려워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용기는 소중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두려움의 진정한 반대말은 용기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합니다.

     

용기와 믿음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힘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두려움 자체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눈앞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봅니다. 그분이 나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세밀하게 붙들고 계시는지를 압니다. 그 앎이 두려움을 밀어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작게 볼 때 자라나고, 믿음은 하나님을 크게 볼 때 자라납니다. 결국 두려움과 믿음은 같은 자리를 두고 싸우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가... 그것이 내가 두려움 속에 머무느냐, 믿음으로 나아 가느냐를 결정합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사방이 원수로 둘러싸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시편 27편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편 27:3)

     

이것은 상황이 좋아서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다윗도 분명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 앎이 그를 붙들었고, 절규 대신 찬양을 선택하게 했으며, 두려움 대신 믿음을 붙들게 했습 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변화가 그의 고백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이 밀려오는 그 순간, 절규가 아니라 찬양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감정을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두려움보다 깊어질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고백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 한켠에는 어떤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고 있습니까? 그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을 더 크게 바라 보시기를 바랍니다. 시선을 문제에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그 순간,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이권율 목사 올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하가 주유소에서 성도님들이 함께 암송했던, 팔복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말씀은, 여덟 복 중에서 가장 역설적입니다.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니" 세상의 언어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역설 안에 하나님 나라의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박해란 무엇인가요?

박해란 단순한 어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억압입니다. 누군가의 신앙을 짓밟고, 그 믿음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힘의 행사입니다. 그렇기에 박해 앞에 선 신자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타협할 것인가, 끝까지 지켜낼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믿음은 평온한 일상보다 박해의 불꽃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도가니가 금의 순도를 밝히듯, 박해는 우리 믿음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시험대입니다. 박해의 강도가 세질수록, 그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가 더욱 극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니라." (마 5:12)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에서, 목숨을 위협하는 박해는 없을지 모릅 니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 중동의 들판과 골목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삶을 잃고, 가정을 빼앗기고,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그들은 박해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있습니다.

     

역사는 분명히 증언합니다. 박해는 교회를 지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세상 끝까지 흩어 심었습니다. 핍박이 거셀수록 복음의 씨앗은 더 멀리, 더 깊이 뿌려졌습니다. 박해는 하나님 나라를 막는 벽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거창한 순교의 자리가 아닐지라도,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정직함, 관계 안에서의 용서,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야 하는 가치들... 때로 바로 그 자리가 우리의 박해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끝까지 서 있는 자에게, 주님은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천국은 생을 다하고 죽어서 가는 장소이기 이전에, 박해의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간 하루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건강 문제, 직장의 프로젝트, 관계의 갈등, 재정의 압박, 배우자와의 어려움, 자녀로 인한 근심… 크고 작은 문제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가운데 우리의 하루하루가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한 번의 큰 사건 때문만이 아닙니다. 묵묵히 잘 견뎌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감당할 수 없어 터져 버리는 순간... 감정을 놓아버리고 영적인 무력감과 곤고함에 빠질 때, 그때 인생의 박해가 우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시간을 견디는 자에게, 주님은 반드시 천국을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은 변하지 않는 줄 믿습니다.

     

이권율 목사 올림.

 
 
 

지난 화요일, 아브라함 선교회 어르신들을 모시고 갈베스톤으로 봄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전날부터 교회에 나오셔서 정성껏 식사를 준비해 주신 성도님들, 오고 가는 길을 안전하게 운전해 주신 분들, 그리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세심하게 챙겨주신 성도님들 덕분에 참 행복했습니다. 아브라함 선교회 한 분 한 분을 섬기고자 하는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모였기에, 우리 모두 아름다운 기억만을 안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선교회에 속하신 분들 가운데는 저와 함께 오랜 시간 믿음의 공동체에서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유학생 시절 청년부에 있을 때부터 뵈어온 분들도 계시니, 참으로 긴 시간을 함께한 셈입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사역이라는 핑계로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이번 봄소풍을 통해 한 공간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하며 어르신들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깊게 파인 주름과 부쩍 수척해진 모습들, 그리고 삶의 무게와 신앙의 흔적들이 제 눈과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 순간, 문득 아버지에 관한 글이 떠올랐습니다. “열 살이 되기 전, 아이에게 아버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슈퍼맨이다. 그러나 10대가 되면, 아버지도 모르는 것이 많고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대가 되면,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30대가 되어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면, 아버지 말씀이 가끔은 맞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40대가 되면, 아버지의 말씀이 귀 담아 들을 만하다고 여기게 된다. 50대가 되면, ‘이럴 때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60대가 되면, ‘아버지 말씀이 다 맞았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곁에 계시지 않는다.”

     

이제야 저도 조금 철이 드는 것인지, 어르신들의 말씀 중에 귀 담아 들을 귀한 지혜가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분들은 여전히 저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바라보며 늘 염려하시고, 사랑으로 걱정해 주십니다. 이런 모습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묵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믿어 주시고,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에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께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 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덮으시는 그 사랑을 의지하며, 다시 믿음으로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8)

     

이권율 목사 올림.

 
 
 

Address: 1520 Witte Rd, Houston, TX 77080

Contact Us: 713-468 2123 l fghouston1959@gmail.com

© 2017 by Full Gospel Houston. All Rights Are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