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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실마다 LED Screen으로 교체하면서 기대감과 함께 걱정이 있다. 나나 성도님들이 좋은 시설과 예배의 본질을 혼동할까 하는 걱정과 강단 중앙에 있던 십자가를 떼고 그곳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다 보니 성도님들의 반응에 대한 걱정이다. 예배당을 옮기고, 체육관과 교육관을 짓는 변화에도 걱정이 없었는데 요즘은 작은 변화 앞에서도 멈칫한다. 나이를 먹나 보다. 그래서 성도님들에게 최대한 혼동을 주지 않으려고 기존 프로젝트에 십자가 형상을 담아 달라고 부탁한 후 예배시간에 와보니 되어있지가 않았다. 그 순간 화가 났다. 그래서 부교역자들에게 목회를 쉽게 생각한다면서 예배전임에도 볼멘소리를 했다. 그 순간 예배를 앞두고도 화를 못 참는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하나 됨을 강조한다. 포도나무와 가지비유를 통해서도 그렇고, 몸과 지체, 남편과 아내 비유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강조한다. 이처럼 신앙은 하나님과 하나 됨이다. 요즘 새벽예배를 통해 에스겔서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답답하다. 하나님은 심판과 회복을 통해 끊임없이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음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 버젓이 우상숭배하고 자녀들을 불가운데로 지나게 한다. 마치 하나님을 조롱하는 듯 하나님 얼굴 앞에서 불순종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주며 하나 되자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꾸 뒷걸음치듯 도망치고 있다.

     

어느 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느냐”라고 질문한다. 그런데 이 질문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느냐고 반문해 본다.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하시는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을까? 왜 이방민족이 우상숭배하듯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대하고 형식적으로 대할까? 상처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겨 포로로 끌려오고 성전도 무너진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흘려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선포하라(겔 2:5)고 하신다. 이스라엘과 하나 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이처럼 상처는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막는 장애물이다. 나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나를 증명해 준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이런 열심은 항상 인정과 결과물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처럼 내 뜻대로 안 되면 나도 힘들고 주위도 힘들게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매 순간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말이다. 글이 말씀이 내 말씀이 되길 소원해 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와 연합하려는 의지 때문에 용기를 가져 본다.

     

 
 
 

10일간의 비전집회가 마쳤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민교회에서 10일간 집회를 할 수 있느냐? “고 한다. 이런 질문 속에서 2003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했으니 올해가 23번째다. 비전집회중 어느 강사목사님이 옆사람의 손을 잡고 기도하라고 한다. 그래서 옆에 계신 성도님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거칠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엄마 손 같다. 분명 호미질하시던 우리 엄마 손 같다. 이처럼 얼굴은 고우신데 손이 거칠게 느껴진다. 그 순간 힘겨운 이민생활이 느껴진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하신 손이다. 그런데 이분은 예배 때마다, 기도 때마다 이 손을 들고 기도하고 찬양하신다. 우리 교회 1세대 가운데 이렇게 손을 들고 기도하고 찬양하시는 분들이 많다. 눈물이 핑돌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손을 든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경은 우리에게 손을 들라고 하시면서 손을 든다는 것에 의미를 말씀하고 있다. 첫째는 “내가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었다“(시 28:2)는 말씀처럼 손을 든다는 것은 간절한 기도의 표현이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쟁할 때 손을 펴고 기도했던 것이다(출 9:29). 이처럼 손을 들고 기도할 때 기도응답과 승리가 있다. 둘째는 “내가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내손을 들리이다”(시 63:4), “성소를 향하여 너희는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2)는 말씀처럼 손을 든다는 것은 찬양의 의미이다. 무슨 말인가? 이처럼 손을 올리는 것은 찬양이기에 하나님은 올려진 내 손을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셋째는 “아론이 제사장을 향하여 손을 들고 축복했고“(레 9:22), “예수님도 백성들을 향하여 손을 들고 축복했다”(눅24:50)는 말씀처럼 손을 든다는 것은 축복의 표현이다. 아무것도 아닌 손이고, 때론 먹고살기 바쁜 손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손을 들 때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고, 축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 1세대 가운데 예배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손을 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10일간 집회를 하느냐고 말할 때마다 “주님이 하셔요”라고 말하면서도 내속에 “나니까”라는 내 의가 있었다. 그런데 맞붙잡은 성도님의 거친 손에서 “하나님이 하시지만 순종하는 성도님들을 보게 하신다”. 그리고 이들의 순종이 오늘의 우리 교회를 있게 했고 23년 동안 매년 10일간의 비전집회를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기에 이 손은 거룩한 손이고 아름다운 손이다.

     

비전집회가 마쳐졌다. 이제부터는 내 손이 더 올라갔으면 좋겠다. 손을 뻗는다고 하나님이 닿는 것은 아니지만 더 뻗었으면 좋겠다. 성도님들과 함께 손을 더 뻗어 기도하고 찬양하고 서로를 축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간절함을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 주님… 사랑해요

     

홍형선 목사

 
 
 

신앙의 터닝포인트(Turning Point)를 찾으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살전5:16-18)라는 것을 모르는 신앙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가정의 문제로, 육신의 질병으로, 생활의 가장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들이 부족함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려는 이들도 있다. 또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어찌할 바 몰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으며, 물질은 있지만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곤고함으로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돈이 최고”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건강이 제일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코로나 이후로 더더욱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풍성한 삶이 오히려 마음을 타락시키고 믿음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하며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도, 모든 상황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도 그 가운데 쉬지 않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몸에 가시가 있음에도 약할 그 때에 강함되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했다(고후12:9-10). 때로는 인생의 가시가 몸과 마음의 병 그리고 신앙의 병을 낫게 하는데 재료가 된다. 요셉처럼 타향 살이, 종살이, 옥살이를 하면서도 환경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행복했다. 불행한 사람은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의 삶 뿐만아니라 함께하는 가까이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의 삶까지도 더불어 불행하게 만든다. 기도가 필요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삶과 신앙에 터닝포인트(Turning Point)를 찾아야 한다. 터닝포인트란 어떤 상황이나 삶과 신앙의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는 전환점을 말한다.

     

믿음의 사람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부르짖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삶과 신앙의 위기는 다른 말로 기도의 위기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다. 기도로 정면 승부해야 문제의 터닝포인트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만큼 강력한 무기(능력)이 되기에 환경의 터닝포인트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고백하는 감사뿐이다. 기도할 때 가장 많이 해야 할 말이 감사이다. 그래서 기도는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난다.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삶에 감사가 없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5-17절에 보면 감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며 모든 일에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라고 말한다. 감사하는 것이 세상에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선포하는 것이고 나를 지키는 길이다. 감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축복의 통로이며 환난 중에 가장 큰 신앙으로 마음에 평강을 준다. 사도 바울이 터닝포인트를 찾기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는데(딤전1:13) 다메섹 도상에서 빛되신 주님을 만나고 터닝포인트를 찾은 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고백하고 사랑에 빚진 자로 귀한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했다. 신앙의 터닝포인트를 찾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시대의 영적 흐름을 깨달아 믿음으로 순종하여 영과 육이 살고 가정과 교회가 산다. 그 일에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윤호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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