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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로마서를 나누면서 내 안의 축복은 하나님께 기쁨 드리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고 싶은 몸부림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하나님께 감동을 드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해 본다.

     

오늘 금요예배 인도가 참 힘들었다. 음향을 담당하는 Vincent 간사님이 휴가 중이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예배를 위해 수고하고 있지만 내게 음향 소리가 너무나 익숙하지 않게 다가왔다. 조명의 색도도 설교원고를 보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는 이런 외부 상황에 속절없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예배 초반부터 부담감을 넘어 위기감까지 들었다. 설교를 마치고 기도 인도를 하는데 예배가 뚫리지 않는 느낌이다. 허공에 메아리치는 것을 넘어 고무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공허함이 나를 짓눌러 몸부림치며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성도님들께 이런 마음을 나누고 회개하자고 했다. 혹시 공허함이 느껴진다면 무조건 회개하자고 했다. 어떤 부분을 회개할지 몰라도 무작정 회개하자고 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분명히 이 자리에 계신데 하나님을 못 느끼는 나의 죄악을 회개했다. 그런데 문득 내 입술에 있는 악한 말과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관계를 해치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도 제목을 바꾸어 무조건 축복하는 기도를 하자고 했다. 하나님도 자녀로서 축복하고, 교회와 보이는 모든 것을 향해 축복하자고 했다. 그래서 “축복해요””축복해요“만 외쳤다. 또 서로를 찾아가 손을 잡거나 얼싸안고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 한다”고 외쳤다.

     

나 또한 교회를 축복하고 휴스턴 땅과 열방을 축복했다. 그러던 중 이웃교회를 축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공중 앞에서 개 교회 이름들을 불러가며 축복하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오해도 살 것 같아 마음의 감동을 외면했다. 그런데 가슴 한쪽이 찌릿한 것이 아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이웃교회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축복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 순간에 영적 기류가 바뀌어지면서 막힌 것이 뚫어지고 기도가 모아짐이 느껴졌다. 하나님의 통치가 느껴졌다.

     

하나님은 관계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관계의 원칙은 외모나 재물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하여 누가 죽어 주었는가이다. 예수님이 죽어서 세운 사람이 내 옆에 있는 사람이고, 내 주위에 있는 교회이다. 그러기에 내 주위를 축복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께 감동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하는 오늘의 큐티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주님! 내 삶이 주님께 감동이 되고 싶어요.


홍형선 목사

 
 
 

99세 된 송형섭장로님을 찾아뵐 때마다 감동이다. 일전에는 나에게 “목사님.. 천국 가고 싶은데 하나님이 안 데려가요”하신다. 연세가 많아져 거의 자리에 누워만 계시다 보니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거기에다 드실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라 영양제 음료나 바나나우유만 소량으로 드신다. 삶이 고난이다. 하루하루가 외로움이고 고난이다. 그러기에 기도 제목이 “하나님 나를 데려가 주세요”이다. 그런데 오늘은 방문했더니 성경책 옆에 있는 종이에 무엇을 쓰고 계신다. 그래서 장로님 무엇하고 계세요 했더니 “영어단어 외우고 있어요”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대화 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 하나 구원하지 못할 줄 아냐”라고 하셨다면서 우신다. 아마 하루하루가 고통이다 보니 어느 순간 죽음이 두려웠고 구원의 확신마저 흔들렸나 보다. 그런 장로님을 보시고 하나님이 “내가 너 하나 구원하지 못할 줄 아냐”며 위로해 주신 것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순종하는 장로님의 모습에서 다니엘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3)”

     

나는 목회현장에서 매일매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한계를 느낀다. 우리 교회가 그리 큰 교회는 아니지만 나는 우리 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줄 몰랐다. 성장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지만 all nations all generations all languages의 비전 속에 사역이 다양해졌다. 문제는 내가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계의 무게에 짓눌려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했다. 기도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오늘도 같은 자리에 있다. 그래서 결국 도망치는 대신에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 기도를 했다. 이 기도를 1년 이상 새벽마다 한 것 같다. 그런데 문득 능력이 무엇일까라는 질문 속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그런데 송장로님의 모습 속에서 ”순종이 능력" 이라는 감동이 왔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순간순간 순종하면서 한 발 한 발 내딛는 모습이 영성이고 능력이라는 것이다.

     

휴스턴에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것이 가을이다. 봄빛에는 딸을 밭에 보내고, 가을빛에는 며느리를 밭에 보낸다는 옛말처럼 가을빛이 뜨겁다. 온다던 비는 안 오고 10일 가까이 따가운 가을빛이 내리쪼인다. 감나무에 달린 감들에게 이 태양빛이 얼마나 따가울까? 여름 태양도 견디며 열매를 지켰건만 이 가을빛에 열매들이 상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시간을 만들어 큰 통에 물을 받아 달구지에 싣고 가서는 나무마다 몇 바가지의 물을 주었다. 나무들이 고맙다고 하는 것 같다. 기쁘고 이것이 나의 작은 일상 중 하나이다. 이렇게 주어진 일상에서 순종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 거룩이고 능력이 아닐까? 어차피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하나님이 하신다. 그렇다면 나는 순종으로 서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기뻐하자.

     

주님… 순종이 거룩이고 능력입니다.

     

홍형선 목사

 
 
 

일전에 아내가 나에게 얼굴이 바뀌어졌다고 한다. 예전 얼굴이 아니라 점점 사나워진다고 한다. 그래서 속으로 “당신이 내속을 긁어놓으니 그렇지”하며 내 얼굴의 변화를 아내와 환경 때문이라고 치부했다. 또 아내가 나에게 얼굴에 대하여 하는 잔소리 중 하나가 “표정관리를 잘하라”는 것이다. 좋으면 좋은 것이, 화나면 화난 것이 그대로 드러난다면서 표정관리를 잘하라고 한다. 아내의 이런 말들이 생각이 나서 거울 앞에서 내 얼굴과 직면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최대한 좋은 표정만 짓다 보니 내 얼굴이 괜찮은 줄 알았는데 현실과 직면하고 보니 뚱한 것이 불만이 가득 찬 얼굴이다. 그리고 얼굴이 왜 이리도 큰지… 한마디로 실망이다.

     

얼굴은 마음의 창이라(점 15:13)는 말이 있다. 마음의 밝고 어두움이 얼굴로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주님과 함께함 속에서 오는 즐거움인데 내 얼굴이 기쁨이 아니라 불만투성이고 사납다면 나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삶을 추적해 보았다. 그런데 추적할 것도 없이 평범한 일을 할 때를 넘어 영적인 일을 할 때도 화가 나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교역자들과 미팅을 하면서 기도제목을 가지고 통성기도 하자고 한 후 기도하다 보면 입술만 달싹이는 교역자가 보인다. 그 순간 “나이 많은 나도 죽기 살기로 기도하는데…” “자기가 예배인도나 기도할 때는 죽기 살기로 하면서 왜 저래” 하면서 짜증이 난다. 이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듯 이런 짜증들이 모여서 내 얼굴이 사납게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짜증은 감정이고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정은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긍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짜증은 나만 손해 본다는 비교에서 오고, 또 감사를 잃을 때와 쉼을 잃을 때 온다. 그래서 짜증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도록 마귀가 쳐 놓은 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짜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그래서 짜증이 날 때 짜증은 나와 상관없음을 선언했다. 짜증을 일으키는 마귀를 향해 나에게서 떠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감정에 느껴지는 것을 넘어 아름 다움을 찾아보았다. 짜증을 일으키는 사람을 보면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긍정적인 면을 찾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찾고 보니 아름다운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짜증의 지수들이 낮아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변한다. 이제 내 얼굴에서 미백의 청순한 얼굴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거칠고 주름은 깊어간다. 그렇지만 인자한 얼굴은 내 몫이라는 사실 앞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겠다.

     

주님! 주님 닮은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얼굴이 되게 하소서..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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