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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진 십자가

     

구레네 시몬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 구레네(리비아)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는 경비를 위해 몇 년간 아껴 쓰며 준비했을 정도로 그는 헌신적이고 신실한 사람이었다. 어렵게 왔기에 예루살렘에서도 그 누구보다 보는 것과 듣는 것마저도 조심하며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흉악한 죄를 짓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죄인 예수와 만났다. 죄가 얼마나 크기에 엄청난 고문을 당했는지 피투성이다. 끔찍한 몰골이다. 이런 부정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이 죄인 청년이 자기 앞에서 넘어진 후 일어나려 애쓰다 다시 넘어진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하는데 로마군병이 무어라 소리치더니 자기 옷덜미를 낚아채더니 십자가를 대신 지라 한다.이러려고 예루살렘에 온 것이 아닌데... 내 의도와 상관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이민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런 분들 중에 한 분에게 전화가 왔다. 시아버지가 소천했는데 나에게 장례예배를 부탁하고 싶다고 한다. 많은 목회자 중에 나에게 부탁한 것에 고마움도 있었지만 일면일식도 없는 분의 장례예배를 어떻게 인도해야 하나 하는 부담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이 분의 도움이 고마워서 그 자리에서 허락했다.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을 믿었느냐“는 한 가지만 묻고 허락했다. 허락을 하고 나니 내가 구레네 시몬 같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 같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진 후에 부정해 보여 외면했던 예수님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청년의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구레네 시몬의 예루살렘 여행이 끝났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구레네 시몬은 안디옥교회의 리더 중 한 명이 되었고 그의 아내는 사도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루포는 시몬의 아들, 롬16장)라고 고마움을 표현할 정도로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되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개인의 구원을 너머 가족구원을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오늘 장례식장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자”라고 선포했다. 천국소망을 선포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끌려간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에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오늘을 살아가게 했다. 그러기에 오늘도 억지로 져야 할 십자가 앞에서 부담감과 함께 기대감이 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평범한 인생은 되어도 남들이 이해 못 하는 삶, 구원은 없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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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일기. 2월 15일

     

오늘 큐티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신다.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신 후 돌 던질 거리만큼 떨어져 혼자 기도하신다. 얼마나 간절한지 기도 소리가 제자들 귀에 쟁쟁히 들려온다. “할 수만 있다면 내게서 이 잔을 옮겨 달라”라고 기도하신다. 십자가를 피해가고 싶고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왜일까?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을 때도 자기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시고, 변화산상에서 영화로운 몸으로 변모하신 모습에 제자들이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서 살자고 하자 자기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고 찬물을 끼얹었던 분이 정작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못 지겠다고 하신다.

왜일까? 아마도 십자가의 고통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온 인류의 죄의 무게에서 오는 중압감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말의 역설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피해가고 싶어 몸서리치셨나 보다.

     

젊어서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설레였다. 결혼도, 이민도, 개척 같은 목회도 설레였다. 그런데 인생이 겹겹이 쌓이면서는 많은 것들이 경험된 것들 위에서 시작한다. 알고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설레임보다 두렵다. 이일의 과정을 알기에 때론 피해 가거나 포기하고 싶다.

그래서 젊어서는 용기 있게 순교도 운운했지만 지금은 조심스럽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알지만 십자가를 지시기로 하셨다. 그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 하신 후 십자가로 가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 그래서 모든 인류와 나의 구원의 문이 열린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알기에 십자가를 거부했다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기에 십자가의 능력은 알고 행함에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나이가 먹으면서 알아지고 경험되어졌기에 도전에 갈등이 있지만, 이 갈등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때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나이 먹었기에 경험이 있기에 주저하지 말고 십자가를 질 때 십자가의 능력을 더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죽어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과감히 도전하는 내가 되고 싶다.

오늘이 그런 날이 되게 하소서.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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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일기. 2월 8일

     

휴스턴에서 있는 우리 교회가 속한 AG한국총회 교단 실행위원 모임이 3일간 있었다. 수요일 오후에 실행위원 모임을 마친 후 제일 먼저 유혜광장로님과 커피 한잔을 했다. 실행위원 모임이 시작하기 전인 월요일 아침에 만나고 싶었는데 서로의 시간이 맞지 않아 실행위원 모임이 끝난 수요일 오후에 만났다.

     

지난 주일 2부예배시에 교회 창립 44주년 감사예배와 장로, 안수집사 임직식이 있었다. 주일예배 시간에 임직식을 같이 하다 보니 시간이 없다. 그래서 짧으면서도 의미 있는 임직식을 위해 임직자들에게 간증 있는 고백을 부탁했다. 그런데 유혜광장로님께서 간증을 하시는데 간증보다 가르침같이 들렸다. 내가 의도한 것과 멀게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교육을 위해 지적할까? 말까? 지적한다면 이 자리에서 할까? 말까? 짧은 시간 속에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그러면서 유장로님께서 내 마음을 알아줄 것 같아 그 자리에서 “장로님의 역할은 담임목사의 의도를 아는 것”이라며… 그런데 의도와 동떨어진 고백을 한다며 지적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적한 후 마음이 불편하다. 이 불편함을 가지고 예배가 마쳐졌다. 기뻐해야 할 창립주일 예배와 임직식 예배가 마쳐졌음에도 마음이 불편했다. 오후 내내 이 불편함이 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이 불편함은 예배 중에 있었던 나의 또 다른 나의 실수를 소환했다. 임직식 중 임직자들에게 사진을 찍자며 임직자들을 줄 세우던 나의 모습이 보였다. 기름부음 있는 예배를 강조하는 내가 예배를 우습게 여기는 행동이다. 너무 부끄럽다. 평상시 진행을 잘한다는 말에 붙잡혀 만들어 낸 교만 같아서 부끄럽다. 쥐구명이라도 들어가고 싶다. 이대로 잠자리에 들수 없어 밤늦게 장로님에게 만나자고 해서 오늘 장로님과 커피를 하게 된 것이다.

     

유장로님에게 정말 미안하다. 장로님에게 있어서 이날이 인생에 단 한번뿐인 날로 얼마나 기쁘고 의미 있는 날인가? 그런데 나의 교만이 축하는 못해주고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오히려 나를 걱정해 주신다. 평상시와 다르게 밤늦게 연락한 후 급하게 만나자고 해서 무슨 일이 있는지 염려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3일 동안 걱정했다면서 오히려 나를 격려하신다.

     

나는 참 내 중심적이다. 그래서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으며 못 견뎌한다. 하고 싶은 것은 해야 직성이 풀린다. 심지어는 예배에서도 내가 원하는 영적분위기가? 나와야 예배가 성공한 것 같이 느낀다. 그러다 보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다. 목회자로 합당치 않은 모습이다. 창립 44주년에 하나님께서 나의 이 부분을 다루시는 것 같다.

장로님과 헤어져 돌아오는데 마음이 깃털 같다.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나에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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