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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그분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며 죄와 싸우는 존재들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는 여전히 넘어짐과 실패, 그리고 반복되는 죄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죄를 ‘작은 죄’와 ‘큰 죄’로 구분하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건 누구나 하는 실수잖아” 하며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시선에서도 죄에 크고 작음이 존재하는 것인가…

     

성경은 죄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한복음 16장 9절)

     

이 말씀은 죄가 단순히 도덕적인 실패나 윤리적인 잘못을 넘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죄의 뿌리는 행동 이전에 믿음의 문제이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는 마음의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모든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의 불순종이며,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죄는 동일하게 죄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크고 작은 죄가 있을 수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죄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영적 현실입니다. 더 나아가 죄는 생물처럼 자라고 번식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고 사소해 보였던 죄가 점점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결국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며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작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결국 더 큰 영적 무너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의 현장 안에서도 죄가 교묘하게 숨어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각한 아이러니는 사탄이 자기를 가장 안전하게 숨길 장소를 우리가 명백하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찾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수많은 악마적 행위를 위해 이용된다. 그것이 사탄의 가장 안전한 가면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깊은 영적 경각심을 줍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중심에 자기 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비교, 교만, 영적 우월감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단순한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과녁에서 벗어난 모든 마음의 상태와 삶의 방향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믿음으로 죄의 열매가 아니라, 죄의 뿌리를 다루는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 죄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내 마음이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를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삶이며,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와 동기만큼은 순수해야 합니다. 비록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넘어졌음을 깨달을 때에는 부끄러워할 줄 알고, 솔직히 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주간도 나 자신을 돌아보며, 정결한 영혼과 정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여정인 줄 믿습니다.

      이권율 목사

 
 
 

시리아민족을 섬기기 위해 단기선교 가기로 하신 김남철 안수집사님께서 선교 떠나기 몇일전에 쓰러지셨다. 함대별 찬양제에서 찬양을 마치신후 쓰러지셨다. 심장에 장착한 피스메이커(pacemaker)와 심장박동이 맞지않아 쓰러지신 것이다. 결국 911이 와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다음날 병원을 방문했더니 아마도 이번 선교여행은 못 가실것 같다고 한다. 나 또한 당연히 못가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 퇴원하고 바로 주일 예배에 오셨다. 예배 내내 눈물을 흘리며 예배하신다. 예배가 끝난후 부부가 찾아와 선교지에 가겠다고 하신다. 안가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것 같고, 타협함이 나중에는 예수님마져 배반할것 같다며 가겠다고 하신다. 죽을 인생이었다면 4일전에 죽었다며 선교지에서 죽어도 좋다고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도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신다. 그 흐르는 눈물에서 돌파하고자 하는 믿음이 보인다. 지금 우리 교회는 돌파가 필요하다. 수많은 도전과 세상의 가치를 뚫어내는 돌파가 필요하다. 그런데 집사님의 고백속에 우리교회의 돌파가 보인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하여 떠나는 아브라함을 묵상하며 파송기도해 주었다.

     

이번주 생명의 삶에서 요셉을 만났다. 성경은 요셉의 인생에서 있었던 4번의 순종을 소개한다. 요셉은 임신한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오라(마1:20,21)는 말씀과,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라(마2:13)는 말씀과, 애굽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마2:19,20)는 말씀과, 갈릴리 지역 나사렛으로 가라(마2:22,23)는 말씀에 순종한다. 그 어느것 하나 쉽지않다. 당시 혼전 임신한 여인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 그런데 내 씨도 아닌데 데려오란다. 애굽으로 피신하여 이제 정착하여 살만한데 이스라엘로 돌아 가라고 한다. 그것도 욥바나 예루살렘이 아닌 시골마을로 돌아가란다. 요셉 입장에서는 그 무엇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짜증부터 났을것 같다. 그런데 요셉의 아름다움은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순종은 예언의 성취를 가져 왔다는 것이다.

     

김남철 집사님 부부는 왜 우셨을까?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감사와 헌신의 의미도 있겠지만 아마도 내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하기 위한 눈물 이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그 눈물은 감정이 복바쳐서 흘린 눈물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주권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주님이 부르시기에 가는 길 앞에서 흘린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순종의 눈물이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나 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물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시84:5,6)”

     

여기에 보면 눈물의 골짜기는 피해야 할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샘을 터트리시는 자리이고, 시온의 대로를 만드는 자리라고 한다. 지금 나와 우리 교회가 필요한 것은 어떤 전략이나 계산이 아니라 이 눈물의 순종이다. 이해되지 않고 설명이 되지 않아도 맡기는 순종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내가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물어본다.

     

주님!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신다면 그곳에 샘을 내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고 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와 우리교회가 눈물로 예언을 성취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홍형선 목사

 
 
 

나의 하루는 늘 새벽예배로 시작된다. 그러나 새벽예배를 향해 가는 길은 언제나 여유롭지 못하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새벽예배에 가려면 늘 쫓긴다. 전날 밤에 “내일은 10분만 더 일찍 일어나자” 다짐하지만, 몸은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깨어난다. 그래서 교회로 가는 길의 신호등이 내 마음을 좌우한다. 어떤 신호등이 빨간 불이냐에 따라 예배당 도착 시간이 3–4분씩 달라진다. 오늘도 마음이 급해 부리나케 달리는데, 앞차들이 두 레인에서 나란히 천천히 움직인다. “이러다 저 신호에 걸리겠는데…“ 그리고 염려가 현실이 되어 내 눈앞에서 신호는 빨간 불로 바뀌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전에 쓰던 언어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화가 나서 신호를 저따위로 만들었냐면서 애매한 공무원들을 욕했다. 분을 삭이며 멍하니 빨간 신호등을 바라보다가 “나는 왜 이렇게까지 급할까?”라고 생각했다.

     

곰곰이 돌아보니, 나는 시골에서 자라다 보니 부지런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삶을 배웠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보다 빨라야 했고, 성공하려면 속도와 경쟁이 미덕이었다. 그렇게 달려온 삶의 방식이 어느새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다. 문제는 그 급함이 사역의 자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기다리기보다 결정하려 하고, 과정보다 결과를 서두른다. 그러기에 일이 빨리 해결되면 성취감에 만족해하며, 사람들이 “추진력 있는 목사님”이라고 칭찬하면 마치 내 능력을 인정받은 듯 기뻐했다. 그러나 일이 더뎌질 때면 환경을 탓하고, 사람을 평가했다. 때로는 함께 사역하는 이들에게 조급함에서 나온 감정을 쏟아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빠르든 늦든 결국 이루어질 일들은 다 이루어 졌다. 그럼에도 나는 늘 “속도”를 붙잡고 “나의 패턴”을 고집해 왔다.

     

이런 나를 향해 아내는 오래전부터 “여유 있는 삶을 살라 “고 말해 왔다. 내가 무언가를 하자고 할 때 아내가 항상 반대했던 이유가, 그 급함 속에서 주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아내는 내게 “당신만 좋은 목사가 되려고 하지 말라 “고 잔소리한다. 혼자 앞서 달리지 말고, 다른 사역자들에게도 기회를 주라는 말이다. 급한 마음에 다른 사람의 일을 가로채지 말라는 말이다. 열심히라는 이름으로 혼자만 의롭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니, 이제는 어른이 돼라.”라고 잔소리한다. 나이는 저절로 먹지만 어른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가장 추한 것은 고집이며, 그 고집 속에는 언제나 자기 의가 숨어 있다고 한다. 사실 그렇다. 한 교회에서 20년 넘게 목회하다 보니 후배들에게 해 줄 말이 많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내 경험이 옳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 경험에는…”하면서 은근히 내 의를 세워 왔다. 그런데 어른이 되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 20:26)고 말씀하셨나 보다.

     

아내의 말처럼 내려놓음이 어른의 모습이라면, 그 내려놓음은 곧 십자가 앞에서 자기 의를 포기하는 일일 것이다. 그때 충동적인 열심이 아니라 참된 기다림의 영성이 나타날 것이다.

     

오늘 하나님은 빨간 신호등 앞에 나를 멈추어 세우고는 나는 네가 빨리 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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