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일기
아내는 ”죽고 싶다“는 말을 가끔 한다. 얼마 전에는 박정순 권사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달려가 임종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누워계신 권사님께 “권사님은 좋겠다. 천국에서 만나요.”라고 한다. 그것도 해맑게 웃음 띤 얼굴로 이런 말을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천국을 얼마나 사모하고 확신하면 이런 말을 할까?라고 생각보다 “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면… 목회가 힘이든가? 우울증과 공황장애의 잔재인가?”라는 생각에서 “나 같이 부족한 사람 만나서 고생이 심하구나”라는 자책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소리 듣기가 솔직히 싫다.
오늘 수요예배 시간에 이권율 목사님이 요한의 순교와 베드로가 옥에서 풀려남을 나누면서 “사는 것은 사명이라”고 한다. 사는 것이 운명이 아니라 사명이란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명이고, 죽음은 사명이 다하여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데려간 것이라고 한다. 말씀을 들으면서 왜 나는 ”아내의 말에 냉소적일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사실 나도 죽고 싶을 때가 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솔직히 천국에 대한 사모함보다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 열심히 살았다는 착각 속에서 이제 삶을 살아낼 힘이 없다고 느껴질 때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내가 천국 가고 싶다는 말이 거슬리는 것 같다. 그런데 사는 것이 사명이란다. 다시 말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 장을 보면 죽는 이야기로 끝난다. 모세오경의 맨 마지막 장인 신명기 34장은 모세의 죽음을 소개하고, 여호수아서 맨 마지막 장인 여호수아 24장은 여호수아의 죽음을 소개한다. 사무엘상의 맨 마지막 장인 사무엘상 31장은 두 세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소개한다. 역대상 맨 마지막은 다윗의 죽음을 소개하고, 욥기서의 맨 마지막은 욥의 죽음을 소개한다. 구약성경은 이처럼 죽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왜 그럴까? 사명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의 마지막은 사명을 다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라며 낳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계시록 맨 마지막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마쳐진다. 사명을 다한 자에게 하늘나라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아내에게 ”죽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다행히도 삶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천국에 대한 사모함 때문이란다. 사명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내 영적 상태를 가지고 불쾌해 했던 것이다.
나도 사명을 위해 살아내고 싶다. 그래서 진짜 천국을 사모하고 싶다.
“Revival, not survival”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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